◇ 송강호, 그를 다시 만나다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최대한 배제한다고 하였으나, 본 글은 리뷰의 특성상 스포일러(spoiler)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글 말미에 기술한 정치적 견해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사견(私見) 임을 밝힙니다.
'한국 사회의 지난 민주화의 과정을 영화라는 장르에 투사(透射)한 결과물임에 다름없다.'
'스크린을 통해 일그러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되돌아보아야 하는 관객의 시선이다.'
우리 역사의 살아 숨 쉬는 한 공간이었고 삶과 죽음의 현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마지막까지 아프다.
5·18의 경우 군부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광주 밖에서는 아무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군부는 관객석을 봉쇄하고 광주에만 제한된 폭력 극장을 만들었고 관객이 없는 이상 비폭력은 아무런 전술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 관객의 부재는 공수부대의 폭력이 부당함을 호소하고자 하는 광주시민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159쪽)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 학살 2 中 / 김 남주 -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117쪽 )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작은 용기임을 이 영화는 가르쳐주고 있다.'
덧붙임; 김사복 씨 이름에서 유추한 '사북사건'
사족이지만 영화에서 피터 기자가 김만섭에게 이름을 묻자 담뱃값에 새겨진 '사복'이라는 문구를 보고 '김사복'이라는 이름을 적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 엔딩 크레딧에도 나오지만 위르겐 힌츠페터 씨가 죽기 직전까지 자기와 함께했던 김사복 씨를 찾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 이유에서 구한 제작진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나 싶은데(아마 당시에 위르겐 힌츠페터 씨 본인도 김사복 씨가 담뱃값에서 유추해 이름을 적어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필자가 이 '사복'이라는 단어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 기억을 되새김질해서 찾아보니 바로 1980년에 있었던 '사북(舍北) 사태'였습니다. 비록 '복'과 '북'은 엄연히 다른 글자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어감이 비슷하여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시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를 도운 택시 운전사가 이 사북 항쟁을 직ᆞ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노동자나 그와 관련된 시민이었더라면 단순히 담뱃값이 아닌, 여기서 유추해 이름을 '사복'이라고 적어주지는 않았나 하는 다소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나름 개연성 있는 추측을 해봅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 1980년 노동 운동(인천제철, 일신제강, 동국제강, 원진레이온)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던 이 '사북 탄광 노동항쟁'은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회사 측의 착취와 어용 노조에 반발해 정선군 사북읍 일대에서 일어난 탄광 노동자들의 총파업 사건으로, 5.18 사건의 기폭제가 된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의 시대적 동기의 발단이 된 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태로 신군부의 전두환 계엄 사령부 하의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은 200여 명의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해 가혹행위를 했음이 후에 드러났고, 이때 검찰은 31명을 구속 기소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81명을 군법 회의에 송치하여 주모자 등을 계엄 포고령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으며, 7명은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중 한 명인 이원갑 씨는 “파업이 끝나자 정선 경찰서에 세워진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보안사의 고문기술자들에게 고춧가루 고문,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 같은 살인적인 고문과 폭력에 시달렸다”라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 후 2005년 그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관련기사: http://m.jungang.co/news/articleView.html?idxno=4240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