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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효봉 Dec 18. 2022

겨울, 강연여행

어느 인기 없는 강사의 원거리 강연 이야기

카카오택시와 기차역                              

새벽, 다섯 시 이십 분. 집을 나왔다. 어두운 거리를 걷는다. 차를 몰고 가야 할지, 택시를 타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은 택시를 불렀다. 앱으로 택시를 부른 지 3분 만에 택시가 나타났다.     

 

차 뒷자리에 타고 기차역으로 향한다. 거리는 아직이다. 평일이지만 새벽은 어둡고 조용하다. 정적이 가득한 도로를 뚫고 택시가 달린다.    

  

나에게 새벽은 언제나 특별한 냄새다. 항상 축축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그 시간은 비릿하기도 하고, 무언가 덜 말라 부패해가는 낯선 냄새다.      


아무도 없는 새벽이라 그런지 택시는 신호등을 가볍게 무시한다. 기사 아저씨는 가는 내내 아무 말 없는 상황이 불편했던지 카카오택시 앱 이야기를 꺼낸다.   

  

앱 덕분에 택시 기사도 좋고 손님들도 좋다는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늘어놓았다. 정말일까? 일단 나는 좋았다. 새벽의 우리 집구석에서 나와 3분 만에 택시를 잡았으니. 택시 기사도 좋다고 했으니 일단은 맞는 말일까?      


졸음을 쫓으려는 것인지 지루해서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기사는 묻지 않은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나는 한동안 어쩔 수 없이 맞장구치다 기차역 광장 앞에 내렸다.  

    

집에서 출발해 역까지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대낮이었다면 거의 1시간 정도 걸릴 만한 거리였다. 말이 많아서 짜증 났던 택시 기사에게 갑자기 고마웠다.

    

덕분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기차역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와 두유를 샀다. 아침이다. 편의점 구석에서 그걸 꾸역꾸역 먹은 후 스마트폰으로 기사 검색을 하다 나왔다.    

   

역 플랫폼으로 내려가니 찬바람이 세다. 지난 이틀 연속 추위 속에서 일했더니 몸 상태가 엉망이 됐다. 상태가 안 좋으니 찬바람도 겁난다. 후퇴.     


다시 따뜻한 역으로 올라가 기다렸다. 춥다는 걸 느껴봐야 따뜻한 줄 아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야 집이 좋은 줄 아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서는 모르는 게 많아진다.      


그냥 편의점에서 더 있다 나올 걸 그랬다.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역 구석구석에서 노숙자들이 좀비처럼 걸어 나오고, 경찰이 그들과 실랑이를 벌인다.   

  

기차 도착 3분 전쯤에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바람은 차다. 칼바람이 공기를 찢어발기고 있었지만, 불안한 인간을 막을 순 없다.     


드디어 그것이 나타났다. 요란한 안내 방송과 더불어 눈부신 라이트를 켜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그걸 위해 새벽부터 서성거렸다. 끼이이익이라는 표현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소리와 함께 그게 멈췄다.     


KTX에 올랐다. 스마트폰으로 좌석을 확인했다. 12B다. 나의 자리는 중간 어디쯤이며 통로 좌석이다. 새벽인데 인간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처럼 첫 차 타고 강연 가는 것인가?  

   

이런저런 이상한 상상을 하며 그들 속에 섞여 허우적대다 내 자리에 앉았다. 그래. 이 하나의 자리가 나에게 허락된 자리다. 앞으로 2시간 반 정도 나에게만 배정된 자리.   

  

그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았더니 잠시 후 핑크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한겨울에도 미니스커트를 입을 수 있는 젊음을 간직한 그녀는 손에 든 표를 보고 내 옆자리와 나를 번갈아 가며 봤다.     


12A. 그녀의 자리인가 보다. 난 일어나 자리를 비켰고 그녀는 창가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난 다시 내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잠시 후 문이 닫혔다.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이리저리 자리를 찾는다고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출발이다. 시간 되면 출발해야 한다. 그게 룰이니까.     


인간역까지는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한겨울로 달려가는 농촌의 풍경이 빠르게 지난다. 추수하고 남은 볏짚을 포장해 둔 희고 동그란 마시멜로우 같은 것들이 곳곳에 보인다.     

 

나는 30분 정도 잠들었다가 일어나 강연 자료를 가방에서 꺼냈다. 준비가 덜 되었지만 불안하지는 않다.  

    

사실 오는 사람이 적다는 말에 김이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잘해야겠다는 욕심보다는 얼른 끝내버려야겠다는 조바심만 앞선다.      


그래도 약간 수정한 부분이 있어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오랜만에 들여다보니 낯선 부분도 있다.      


그러다 인간역에 도착했다.                 

                             

모닝 카모마일                                                                      

승객 대부분이 서울역에서 내리거나 공항으로 가는 사람들이라 나와 할아버지 한 분만 인간역에 내렸다.  


내 옆자리에 있던 핑크색 미니스커트 여자는 서울역에 내려 어딘가로 총총 가버렸다.      


역에서 화장실에 잠시 들렸다가 밖으로 나가니 비가 왔었는지 거리가 촉촉하다. 우리 동네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북쪽으로 오긴 왔나 보다.     


여기서도 택시를 탈까, 버스를 탈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냥 택시 정류장으로 향한다.      


올 때는 버스를 타더라도 갈 때는 절대 늦어선 안 되기에 택시를 선택했다.      


인간역에서 강연 장소인 마트까지는 생각보다 멀었지만 그래도 15분 만에 도착했다. 가는 동안 택시 기사 아저씨가 마트는 언제 문 여는지 물어보셨다.      


내가 마트 직원처럼 보였나 보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아마 9시부터 열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마트에 도착하니 내 예상과는 달리 문이 닫혀 있었다.      


불도 꺼져 있었다. 택시비를 내고 문화센터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확인했지만, 시간은 9시다. 문 닫힌 마트에 1시간이나 일찍 와버렸다.     

 

싸늘한 찬바람을 피해 마트 건너편에 있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몸을 녹이기 위해 생전 안 마시던 카모마일을 주문하고 아무 데나 앉았다. 잠시 후 나온 따뜻한 카모마일.  

    

노란 색깔에 어울리는 향기가 마음에 든다. 뜨겁게 한 모금 했다. 생각보다 좋았다. 카페에 가면 아메리카노만 시킬 줄 알았던 나에게 새로운 애착 메뉴가 추가되었다. 앞으로 자주 마셔주마.    

 

문득 궁금해 스마트폰으로 카모마일의 효능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카모마일티의 효능은 무엇인가요?     


1. 카모마일에는 항산화 성분이 풍부합니다.

2. 면역력을 향상합니다.

3. 상처나 부상을 회복시킵니다.

4. 피부에 좋습니다.

5. 숙면에 좋고 진정 작용이 있습니다.     


그랬다. 카모마일은 여러모로 좋은 차였다. 너무 추워서 아무거나 주문했는데 항산화, 면역력, 회복, 피부, 숙면이라는 단어를 지닌 차가 내 몸 안으로 들어와 퍼졌다.    

 

가방에서 강연 자료를 꺼냈다. 몸이 녹으니 확실히 집중력이 조금 생긴다. 강연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특히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카모마일을 다 마시고 나니 9시 40분이다. 강연은 10시 10분부터다. 잠시 목을 가다듬고 멍하니 있다가 42분에 일어났다. 카페를 나와 다시 길을 건넜다.      

                         

네 명을 위한 강연                                                            

이제 마트 안에 불이 켜져 있다. 문화센터 입구로 향하니 문도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하고 강연할 방으로 들어갔다.    

  

ㄷ자 형태로 놓인 테이블 위에 빔프로젝터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나에게 전화해 강연을 요청했던 사람은 오늘 쉬는 모양이었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사람들만 자기 일을 보고 있었다. 대신 문화센터 관리자가 와서 참석자 명단을 건네주었다.    

 

아무도 내가 새벽 일찍 일어나 우리 동네에서 힘들게 인간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환대해주는 사람 한 명 없으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난 뭐 하러 여기 온 것일까? 그저 전화 한 통에 홀려 택시 타고 기차 타고 또 택시 타고 문 닫힌 카페 건너편에서 카모마일을 마셨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전화에 혹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연료는 7만원이었다. KTX 왕복 비용을 내면 택시비가 적자다. 샌드위치와 두유, 카모마일도 물론 적자다.     


그러니까 봉사활동이라는 말이다. 그것도 꽤나 먼 거리에서 가는 꽤나 잘 사는 동네에 꽤나 긴 시간을 쏟아붓는 이상한 봉사활동.    

 

노트북을 빔프로젝트에 연결하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예상외로 남자였다. 내 강의는 대부분 자녀를 둔 엄마들이 듣는 강의였는데 의외였다.     

 

그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화센터 바로 앞에 있는 카페의 사장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카모마일을 마셨던 그 카페였다. 아침엔 알바생에게 맡기고 자기 볼일을 본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는데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강연을 들으러 왔다고 했다. 이어서 한 명, 두 명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총 4명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강연 가운데 가장 적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게 됐다. 아, 아니다. 지난달에 있었던 강연은 단 1명이었다. 1명을 앞에다 두고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며 강연했다.   

   

이렇게 사람이 적으면 김이 새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기로 한 강연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준비했던 첫인사의 에피소드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사람이 적으니 나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또 열의가 생긴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풀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씁쓸한 소문                              

강연 초반부에 진행되는 마스터플랜만 이야기하는데 1시간이 지났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더해도 좋다는 문화센터 관리자의 이야기에 방심했다.      


그건 문화센터 쪽의 사정이고, 강연을 들으러 왔던 4명의 사정은 달랐다. 각자 이후 일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 후 한 명이 떠났다.

    

3명이 남았다. 나는 강연을 계속했다. 그들의 표정에 초조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 한 명이 일어나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갔다. 이제 2명이 남았다.  

   

그 두 사람은 마지막에 남을 경우 곤란할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다. 한창 무언가를 이야기하는데 짐을 주섬주섬 챙긴다.      


카페 주인 말고 다른 한 사람, 그러니까 짙은 화장을 한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 여자는 손을 힘차게 들며 말했다.     


“선생님, 정말 좋은 강연 잘 들었어요. 죄송한데 애 밥 주러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럼.”     


그렇게 나와 카페 사장만 남았다. 난 머쓱해져서 남은 강연을 포기했다. PPT를 끄고 의자에 앉아 카페 사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게 더 나았다. 카페 사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도 시간이 되어 나갔다. 컴퓨터를 끄고 빔프로젝터를 정리했다.     


문화센터 로비로 가니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11시 반 정도였는데 점심시간이라는 팻말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난 출석부를 데스크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점심때쯤이 되자 추위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점점 기온이 올라 포근해지고 있었다.

     

뭔가 기분이 더러웠지만, 날씨가 좋아지니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 그냥 잠시 그 낯선 동네의 길을 걸었다. 학교를 마친 초등학생 아이들이 우르르 지나고 거리에 차들이 도시의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집으로 가야했다. 버스를 타고 인간역으로 향했다. 역에 도착하자 전화가 왔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강연을 요청했던 그 여자였다.     


난 한껏 짜증이 밀려와 그 여자에게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관뒀다. 그냥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며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역 구석에 앉아 있으니 또 전화가 왔다. 인간 어디의 마트인데 강연을 해줄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오늘 강연했던 그 마트의 휴가 중이라던 그 여자에게서 소개를 받았단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왔다. 또 인간 어디의 마트 문화센터다. 날짜를 묻고 강연을 해달라고 조른다. 인간역 구석 의자에 앉아 다섯 건의 강연 요청을 받았다.      


모두 다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인간역은 조용했다. 그 조용한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나는 그들 여섯 여자에게 단체 문자를 보냈다.     


“요청은 감사하오나 사정이 생겨 강연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리며, 남은 하루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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