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서 아빠와 엄마는 어떻게 만났는가에 대한 결혼 비하인드를 듣게 되었다. 실은 그 전부터 엄마와 아빠를 알고 있는 지인들은 전혀 어울릴 거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중매로 결혼을 했는데 그 당시 엄마는 경제적인 여건이 갖추어진 아빠를 보고 결혼을 했고, 아빠는 외가 쪽에 서울대를 나온 삼촌이 있다는 말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엄마 아빠는 약간 '현타'가 온 듯 보였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는 '엄마는 아빠의 상가와 결혼했고, 아빠는 삼촌 때문에 결혼한 거네?'라고 정리하듯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두 분의 내용을 정리하며 서로가 몰랐던 비하인드를 알고 어찌나 배를 잡고 웃던지.
그렇게 우리는 저녁시간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여유가 생겼는데 그 중 숨 가쁘게 살아오던 아빠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추억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난다던지 앨범을 꺼내어 본다던지, 나는 그런 아빠가 이해가 되었지만 느닷없는 추억팔이로 인해 엄마는 아빠를 타박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중매 이야기를 하던 그 날 아빠는 의외의 말을 우리에게 해주었다.
시골에서 생활하는 나이 많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한 부모님이 창피스러웠어.
자신은 엄마와 다르게 시골 출신에 주름이 자잘한 나이 많은 부모가 콤플렉스였다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빠는 남들 여유 부릴 때 더 열심히 살았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그 날 나는 젊은 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스스로의 약점을 이제 와서 다 큰 자식들에게 허허실실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약간 코가 찡긋 했다.
술 몇 잔에 뻘게진 얼굴로 횡설수설 늘어놓는 사우디 이야기도, 중장비 기사를 했던 시절의 이야기도 실없이 내뱉어지는 아빠의 무용담들을 가볍게 들으면서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할 거냐며 타박을 늘어놓아도 아빠는 장난스레 웃음으로 마무리 지었다.
과연 아빠에게 어려움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은 늘 품어왔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 좌절이 있던 순간에도 좌절한 적 없는 아빠가 생각된다.언제나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굳세게 돌파해버린 아빠를 말이다.
그런 아빠의 영향으로 나는 세상을 원망하기보다는 조금 더 나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 같다.
갑작스레 '나 다녀올게.'라고 통보를 했을 때도 불같이 화를 내던 엄마와는 다르게 '잘 다녀와.' 허허 웃으면서 '니돈으로 가는 거지?' 하며 우리 딸은 아무 걱정 없을 거라는 굳센 믿음이 깔린 채 질문을 던진 아빠였다.
인생에서 간간히 마주치는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난제들 사이에서도 마음을 끙끙 앓지만 금세 긍정을 발휘하며 헤쳐나가는 나를 생각해보면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보다 싶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각박하게 느껴졌던 순간들이 참 많은데, 아빠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고는 있지만 분명한 건 아빠가 지나온 시간들은 내가 느꼈던 각박함보다 훨씬 더 차가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명랑하던 아빠에게 그런 어려움이 있었을 거란 생각에 우리가 어려웠던 시간들은 어땠냐며 물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런 연고도 없이 낯선 도시로 이사를 갔었는데 그곳에서 적응하며 각자 그 시절을 보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고 마냥 큰 도시로 이사를 왔기에 모든 게 낯설면서 신기할 뿐이었다. 나는 어떤 결정을 할 입장이 아니였기에 현실감각도 없이 부모님을 따라 이사를 갔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해볼때 얼마나 막막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서 최대로 적응하려고 애썼는데 그러한 생각이 든 이유는 당시 가족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어떻게 살았는지, 살고있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디를 놀러갈것인지며.
어렸을때 산이며 들이며 어디든 놀러다녔던 기억은 가득한데 그 시절만 공백이었다.
동생과 나는 집에 남겨져 있던 날들이 많았고, 그마저도 나는 동생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엄마와 아빠는 직장을 다니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다.
우리 가족에게 대화할 여유가 생기면서 동생은 그 시기가 어려웠다고 엄마에게 털어놨다. 그 말들로 인해서 엄마는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곤 나에게 '넌 어땠어? 너도 그랬어?'라고 되물었다. 그런 엄마에게 되려 '학년 올라가기 마지막 날에 선생님이 전학을 와서도 적응을 너무 잘해줘서 대견했어'라며 선생님이 칭찬을 했다고 이야길 해주었다. '난 오히려 엄마 아빠한테 고맙던데'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었던 시절 아빠는 가족들과 떨어져 현장에서 지냈다. 그때 나는 아빠가 어떻게 살았는지 처음으로 물었다. 아빠는 그 시절 많이 속앓이도 하고 엉엉 울었다고 했다. '엉엉'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아빠는 장난치듯 우는 표정을 지으며 강조했다. 우리는 아빠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거짓말하지 마'라고 웃으며 말했다.
아빠가 엉엉 울었다는 그 말이 아빠의 이미지와는 상상이 되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아빠는 명랑하게 삶을 살아간다. 어렸을 때 엄청나게 가부장적이고 부리부리하며 무서웠던 아빠와는 다르게 요즘에는 나도 동생도 '아빠 정말로 정말로 많이 바뀌었어'라고 말한다. 우리의 말을 듣고 엄마는 부정하며 우리의 생각에 놀라워 했지만 사실이었다.
아빠가 그렇게 과거를 우리에게 주욱 이야기했을 때 철(?)이 들었는지 내가 봐온 아빠에 대해 말했다.
나는 아빠의 성실함과 책임감을 보고 자랐어. 아빠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성실하고 가정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아빠한테 고마워.
그 말에 아빠는 잠깐 감동을 받은 듯했다.
내가 바라본 아빠는 끊임없이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리고 좋은 일은 언제나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 여기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누구보다 성실함의 힘을 믿는다. 부모님의 성실함이 모여서 지금의 시간들이 만들어졌고 나도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힘을 믿는다.
때로는 '한방'이라는 단어로 인해서 우리가 가진 성실함이라는 무기가 고꾸라 질 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빠가 이제껏 보여준 성실함에 힘을 믿는다.
아빠는 어느 순간에도 책임을 다 했고 열심히 살았기에 내 인생의 표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