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작가의 꿈을 접다
“방송국에서 일하면 재미있을까?” 대학 시절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은 프로덕션에서 막내 작가로 일을 한 적이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내가 선택한 방법 정면 돌파.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일을 경험해보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고 글쓰기 좋아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작가를 꿈꾸게 되었고 이왕이면 프로그램 이름만 대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방송작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에는 방송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의 대부분이 방송사와 연계해서 운영하는 방송아카데미에 다녔다. 학원에서 방송 작가에 대한 일도 배우고 한 방송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로 연결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만한 경제적인 여유도 넉넉한 시간도 없었고 무엇보다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는 확신이 부족했다.
구직사이트에서 직접 막내 작가 일을 찾았고 면접을 보고 프로덕션에서 일하게 되었다. 목동에 위치한 사무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규모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가정집을 사무실로 개조한 느낌이랄까. 방송사에 영상을 제작해 보내는 외주 업체는 으리으리한 방송국에 비하면 아주 열악했다.
그 당시 내가 맡은 일은 공중파 방송사 교양 프로그램에 보낼 영상을 기획하는 일이었다. 연휴를 맞아 전통시장에서 열린 행사와 특산물을 소개하는 짧은 내용이었다. 나와 함께 일했던 메인 작가님은 어떤 그림을 담을 수 있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주셨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행사 일정을 사전 조사해달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맡은 일이라 의욕이 넘쳤던 나는 수도권부터 지방의 전통 시장 홈페이지와 각종 카페를 샅샅이 찾아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러나 무엇이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는 법. 내가 찾은 행사는 영상을 찍으러 가시는 메인 피디님과 모두 일정이 맞지 않았다. 결국 나는 주말에 모든 조사를 다시 시작했고 겨우 일정이 맞는 곳을 찾았는데, 서울에서 가장 먼 부산이었다. 목동에서 부산까지 가야 하는 피디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 일정이 정해지고 작가님께서는 한 번 읽어보라며 첫 화면부터 시장 상인의 인터뷰 내용까지 작성한 기획안을 보여주셨다. 몇 분짜리 방송도 이렇게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배우게 되었다.
얼마 후 공중파 방송사로 보낸 영상이 방송되는 날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 방송을 시청했다. 언제 나올지 순서를 모르니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전통시장에 대한 방송이 나왔다. 내가 다니던 프로덕션에 모든 것을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집한 결과물이었다. 작가님과 피디님이 만드신 영상은 계획대로 잘 완성되었고, 아주 작게나마 이 영상 제작에 일조했다는 것이 신기하고 뿌듯했다.
그런데 영상이 마치고 방송이 끝날 때까지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더 충격이었던 것은 나뿐만 아니라 함께 일했던 메인 작가님과 피디님의 이름마저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튜디오에서 밝게 웃고 있는 아나운서와 리포트의 인사로 그 방송은 끝났다. ‘우리는 지금 이름도 없이 일하고 있구나.’
아마도 그 순간 방송작가에 대한 동경도 함께 꺼진 것 같다. 회사의 업무 환경도 열악했고, 주말도 보장받지 못했고, 월급도 적었으며, 심지어 동료 막내 작가들의 텃세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 버틴 이유는 언젠가 모두가 알아주는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길까지는 너무나도 멀고 험난하며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과연 수년간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열정과 간절함이 나에게 존재할까.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걸까.
인생은 선택과 후회의 반복이라고 한다. 물론 내가 직접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인생에는 각자의 삶과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길을 놓았기에 나는 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고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사랑을 아이들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막내 작가로 살았던 그 짧은 시기 덕분에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들어가는지 알게 되었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도 방송 스태프들을 챙기는 연예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시상식에서 모든 영광을 스태프에게 돌리는 피디의 이름을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더 나아가 낮은 곳에서 방송 일을 시작한 분들의 꿈을 온 마음으로 지지하고 응원하게 되었다.
나의 ‘이상’은 ‘이성’에 휩쓸려갔지만, 그들의 ‘이상’은 부디 ‘오늘‘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