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의 숲 Jul 10. 2020

꿈으로 박제한 피아노

어린 시절 피아노를 너무 쉽게 포기했던 이야기




분명히 내 말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상대는 속아주고 있다는 느낌. 고작 피아노 한 대 들어가면 꽉 차는 좁은 공간에 그 팽팽한 긴장감이 채워지고 있었다.

열 살 쯤이었을까.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였다. 선생님은 피아노 악보 한 장을 열심히 알려주셨다. 바이엘의 쉬운 음계를 배우면서도 건반에 손가락을 올릴 때마다 미끄럽게 눌리는 촉감과 소리를 내기 위해 울리는 여린 진동이 좋았다. 오른손이 주도하는 멜로디와 왼손이 얹어주는 화음. 각자의 몫을 해내기 위해 바쁜 열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는 게 흐뭇했다.

악보 한 장을 한 번 연습할 때마다 연습장에 빗금을 그어 표시했다. 수첩만 한 크기의 종이 위에는 농구공, 곰인형, 구름 같은 것들이 열 개씩 그려져 있다. 하나씩 선을 그어 그림을 지울 때마다 언젠간 피아노 실력이 늘어 있을 내 모습도 함께 떠올렸다.

하지만 능력을 키우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차근차근 천천히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노력은 한꺼번에 해치울 수도 단숨에 뛰어넘을 수도 대가를 지불하고 살 수도 없었다. 힘겨워도 꿋꿋하게 흰색과 검은색 건반을 끊임없이 번갈아 누르고, 헷갈리는 악보를 읽기 위해 애써야 했다. 피아노를 익히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버티고 견뎌야 했다. 점차 어려운 부분을 연습하기 시작하면서 피아노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감격은 희미해졌다. 명랑하고 투명한 피아노 소리도 지루하고 따분해졌다.

그래서 시작된 거짓말이었다. 선생님은 악보 한 장을 알려주고 다른 아이를 봐주기 위해 나갔다. 그때마다 나는 새로 알려주신 어려운 멜로디가 아니라 이전에 배웠던 쉬운 부분만 반복해서 쳤다. 새로운 부분을 연습하는 것보다 강물처럼 막힘없이 춤추는 손가락을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다. 거짓으로 그은 빗금이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뺐다가 주었다가를 반복하며 자연스러운 빗금을 연출했다.

“정말 열 번 다 연습한 거 맞아?” 심장에 무거운 돌덩이가 쿵하고 내려앉은 듯했다. 이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혼신의 연기를 했다. “네. 다 했어요.” 이후 선생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었고 이쯤 되면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새로 알려준 악보를 버벅거리며 제대로 치지 못하는 나를 보고도 선생님은 잘 가라고 말했다.

얼마 못 가서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다. 실력을 쌓기 위해 어려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나는 자꾸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결심한 것을 꾸준히 이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피아노는 헛헛한 아쉬움만 남긴 채 내 안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연두색 잎사귀에 햇볕이 얹어진 어느 날 미로를 닮을 공원에 갔다. 은은한 풀냄새와 아이들의 비눗방울이 손을 잡고 둥둥 떠다니는 곳이었다. 투명한 수채화 같은 공원에 청아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피아노 선율을 쫓아 발길을 옮겼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허름한 피아노에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꿈꾸던 모습이 두 눈 앞에 펼쳐졌다. 마치 힘든 길을 포기한 대가를 실감한 기분이었다.

집에 가는 내내 때늦은 후회가 지독하게 따라왔다. ‘그때 피아노 좀 열심히 배워둘 걸.’ 무엇이든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고 먼 훗날 언제라도 반드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온 감각으로 느낀 날이었다. 그동안 피아노를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던 건 단순히 화려하게 뽐낼 수 있는 피아노 실력이 없어서 아니라,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내쳤던 어린 시절의 쓰라린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며 사는 지금. 더 이상 어릴 적 아쉬운 장면에 묶여 있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 지켜보지 않는다고 해서 나 자신을 속이던 시간들, 성장의 과정은 가볍게 무시하고 결과의 달콤함만 바랐던 철없던 시절을 아프게 후회한다. 초심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실력을 쌓는 하루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지 이제는 제대로 알게 되었다.

꿈은 가만히 넋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꿈을 향해 묵묵히 걷는 오늘이야말로 꿈을 현실로 만드는 유일한 마법 인지도 모른다. 꿈을 저 하늘의 별처럼 박제시키지 않고 내 곁에 머물게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오늘도 한 발 내딛는다. 꿈을 닮아갈 내일을 향해.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의 ‘이상’은 ‘오늘’이 되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