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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숲 Aug 03. 2020

잠시 어른의 눈을 감는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유난히 재빠르고 차들의 경적소리가 끊이지 않는 강남역 사거리. 서둘러 글쓰기 강연을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급하게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낯선 김밥집에 들어갔다. 제대로 된 간판도 없이 골목길 구석에 있는 허름한 가게가 달갑지 않았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매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김밥 한 줄을 시켰다. 의자의 쿠션이 다 헤져 솜뭉치가 튀어나온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이런 곳은 가게 월세 맞추려면 좋은 재료는 못 쓰겠지.’ 평소 같으면 별 신경 쓰지 않았을 김밥 재료 원산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처음 들어선 가게를 경계하고 있었다.


김밥 한 줄로 겨우 배를 채우고 나가는 찰나에 접시에 남겨진 덩그러니 남겨진 김치가 눈에 들어왔다. 이내 불편한 생각이 따라왔다. ‘혹시 남은 반찬들을 재사용하지는 않겠지.’ 고작 김밥 한 줄 먹고 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난 뭐가 그렇게 불편했을까.

어른이 되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속고 속이는 암울한 사건과 서글픈 뉴스를 자주 접한 탓일까.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보던 시선은 자꾸만 뒤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채웠다.

정체 모를 불안을 떨쳐내듯이 김밥집에서 나와 다시 강연장으로 향했다. 거대하고 튼튼한 건물에 수많은 상가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중에서 홀로 비어 있는 상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불이 꺼져 어두운 유리창에 붙은 하얀 종이에는 ‘임대 문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종이가 창백해 보였다. 임대 문의라는 네 글자의 무게를 힘겹게 버티느라 고단해 보였다.

‘이제 가게 사장님은 어디에서 무얼 하실까.’ 어둡고 캄캄한 그곳에 그 사람의 꿈도 잠들어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의 생업이 무너진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 부푼 꿈을 안고 창업을 시작했을 그 사람이 걱정되었다. 잘 살고 있을까. 왜 여기보다 더 좋은 곳에서 사업을 확장했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스치지 않았을까.

도시에는 어두운 구름이 깔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빗줄기가 굵어지기 전에 강연장에 도착했다. 도서관에서 진행되는 글쓰기 강연은 직장인들을 배려해 저녁 일곱 시에 시작해 아홉 시까지 진행됐다. 뿌듯한 마음으로 도서관에 들어서는데 도서관 직원들이 여럿 남아있었다.


그랬다. 누군가는 밤늦은 시간까지 남아있어야 하는 행사였다. ‘과연 모두가 긍정한 야근이었을까.’ 나에게는 설레는 글쓰기 강연이었지만 누군가에는 그저 아침 아홉 시에 출근에서 저녁 아홉 시까지 야근하는 날이었다. 잠시 그들의 삶이 그려졌다. 애달픈 직장인의 일상이 내 안에 머물다 사라졌다.

살면서 우연히 마주하는 한 장면도 쉽게 돌아설 수 없게 되어버린 어른의 눈. 어른은 되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세상에 숨겨진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된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의심하다가도 또다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삶이 지치지 않고 안녕하길 바랐다.


잠시 마주친 사람의 하루도 무사하고 괜찮기를. 강연을 다 듣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발목에 무언가 매달려 있는 듯 무거웠다. 사람들의 삶의 무게가 옮겨온 탓일까. 그들의 삶을 응원하는 작고 미약한 힘으로라도 그 무게를 나눠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는 잠시 어른의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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