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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딩 숲속 월든 Aug 05. 2023

마음껏 발버둥 치기

함부로 속단 내리기 주저 되긴 하지만 지금 심신이 고단한 주원인은 심인성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가 멈추지 않는 것은 신체증상의 인과를 100% 확신할 수 없고,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름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름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의식적이라기 보다 무의식적이다.

 

솔직해지자. 정말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트라우마다. 치명적 질병을 확진 받게 되는 것. 드라마와 책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그런 병에 걸렸을 때 이어지는 비참한 이야기들이 무의식에 세뇌가 되었다. 실제로 보기도 했으니 진짜처럼 여겨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러한 불안이 교감신경을 항진시켜 잠을 자는 시간에도 가동하게 만든다.

 

생사심은 살고 싶어하고, 죽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다. 생사심은 실체 없는 착각의 '나'로부터 비롯된다. '나'는 생각, 사고기능의 구심점이기도 하고, 강력한 사회화의 도구이며, 사회적 관계망의 모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생사심에 걸려있다는 것은 결국 착각의 '나'가 여전히 왕좌에 앉아 있다는 이야기다. 없는 듯 산다는 것도 아직은 말뿐이며, 착각의 '나'는 막후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죽이라고 하는데, 본래 실체가 없는 유령 같은 것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생각이고, 그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도 역시나 같은 생각이며, 눈을 뜨고 내/외부 환경 자극에 효과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것도 역시나 같은 생각이다. 잠시 숨을 고르자. 또다시 물러서는 것일 수도 있지만, 과연 지금 내가 숨통을 끊을 수 있는가? 과감하게 목숨을 내던질 만한 각오가 되어있긴 한가?

 

어찌 보면 나의 깨달음은 액세서리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교묘한 자기강화, 자기방어 수단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건강한 몸, 가족, 직장, 월급 등 안정적인 삶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깨달음까지 장착하니 이 얼마나 간지나는가? 솔직해져야 한다.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짜이고 착각이라고 퉁치며 눈 가리고 아웅해서는 안 된다.

 

이미 치명적인 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이웃도 있고, 불편한 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부모님도 있으며, 장애를 안고 사는 이웃, 열악한 환경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도 있다. 하나만 묻겠다. 지금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가? 입 속에 궤양 몇 개 생긴다고 당장에 죽는가? 신체 곳곳에 염증과 궤양이 생긴다고 당장에 죽게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다만 지금과 비교해서 불편해지기 때문에 괴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자. 아니 그보다 차라리 이미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었다고 여기자. 마왕(가수 신해철)의 말처럼 태어난 것으로 이미 소명은 다한 것이고, 남은 삶은 그저 선물일 뿐이다. 인지적인 전환이다. 관점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일시적인 생각의 조작이어서 장기적으로 힘을 쓰지는 못한다.

 

갈팡질팡하고 있다. 죽기 살기로 맞짱 떠서 뒈져버릴 것인가? 아니면 잔뜩 웅크리고 이 폭풍우가 지나가기 만을 기다릴 것인가? 하하하. 이 모든 것 또한 생각의 장난 속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실상, 무아, 무념은 이런 갈등에 젖지 않는다. 오직 생각 속에서만 이런 번민이 생긴다. 생각의 쳇바퀴를 계속해서 돌리고 있는 방식이다. 지금 거기에 놀아나는 것이다.

 

대단한 착각, 거대한 꿈, 매트릭스 안에서 울부짖는 꼴이다. 연기의 세계, 인과의 세계 또한 그 자체로 완벽하다. 생로병사는 완벽한 연기적 현상이지만, 오직 생각만이 거기에 시비호오의 해석을 덧붙여 애초에 없고, 필요하지도 않은 괴로움을 만든다. 몸은 실상계와 현상계의 연결고리다. 다시 말해 몸은 현상계가 펼쳐지는 기반이다.  

 

몸은 감각기관을 통해 실상계의 파동을 일부 수용하고, 뇌를 통해 정보를 해석한다. 생명현상의 목적이 DNA의 보존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생각의 가설이고 해석일 뿐이며, 그 또한 자연스러운 연기적 현상일 뿐이다. 즉 생각의 시비호오적 해석만 없다면 불안, 긴장, 두려움은 없다. 물론 병에 의한 통증감각과 불편함은 있겠지만 그 또한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적 현상이다.

 

결국 생각의 알아차림 기능을 통해 '나'의 시비호오적 해석들로부터 놓여짐으로써 릴랙스 되어진다. 지금은 노력을 통해 초점을 맞춰야만 작동되지만, 꾸준히 반복 강화되면 의식적 노력 없이도 자동 작동될 것이다. 질병도 완벽한 연기적 현상으로 신체가 어떤 자극에 반응하고 적응하는 현상이다. 착각의 '나'의 시비호오적 해석의 내용과 같이 나쁘고 해로운 어떤 것이 아니다.

 

'정상'이란 사기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비교, 대조, 분석, 예측의 기능을 하는 기능적 생각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다소 헛 똑똑이인 경우가 많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너무 순진하게 그리고 지나치게 생각을 신뢰했고, 의지했으며, 전부라고 착각했다. 결국 괴로움의 본질은 오래된 고정관념에 있었다. '정상' 상태는 좋은 것, '질병'은 나쁘고 물리쳐야 하는 악.

 

알아차림을 통해 그런 고정관념을 하나하나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도 생각의 강박이다. 욕심부릴 필요 없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끝내면 된다. 질병을 기본값으로 생각하면 거슬리지 않는다. 조작일 수도 있지만, 한쪽 눈이 불편하면 아예 한쪽 눈이 실명된 채로 태어나 살아왔다고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간과 공간 자체가 관념이다. 즉 생각으로 인한 허상이다. 시간이 흐르고 물리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상현실 세계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에 시비를 걸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생각의 힘이 강하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생각을 신봉, 신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실상계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사실 그 또한 단언할 수 없으며, 오직 모를 뿐이다.

 

조심할 것은 교묘한 자기방어. 불편한 것을 원래부터 그랬다고 여기는 것 또한 자기 방어기제다. 무의식의 태생 자체가 대부분 나를 지키기 위함이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움켜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나'의 꼼수다. 실상은 '공수래 공수거 땡큐베리 마치'다.

 

조바심 내지 말 것. 체득된 만큼 놓여질 것이고, 그 깊이와 넓이는 자연스레 확장될 것이다. 그것이 분수이고 깜냥이다. 속았다고 속상해하는 것 또한 착각의 '나'. 그냥 다 같이 살자! 간단명료, 심플하게 가면 된다. 의식의 초점을 실상과 현상의 완벽함을 수용하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것에 맞춘다.

 

살려고 마음껏 발버둥 쳐도 괜찮다. 다만 그런 줄을 알며 흘려보내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것. 태어난 것으로 이미 할 일은 다 했고, 남은 삶은 현상계의 완벽한 연기에 온전히 내 맡기기. 이미 부산 가는 열차는 부산을 향하고 있으니 편안하게 앉아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며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다. 부산 가려고 발버둥 치고 싶다면 마음껏 발버둥 쳐라.

 

이 모든 것이 생각이 만든 일이니 발버둥, 노력, '나'의 착각 등이 모두 강력하게 일어나도 다만 그러 할 뿐이다. 노력하고 애쓰고 방어해서 그물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마음껏 몸부림 치자!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설령 그것이 지금 당장 생명현상이 멈춰지는 일일지라도.


* 2023년 7월 23일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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