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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딩 숲속 월든 Aug 05. 2023

이야기와 죽음

"이야기*는 힘이 세다". 예전에 어떤 책에선가 주워들은 말이다. 이야기는 언어로 되어 있고, 주인공과 주변인물이 등장하고, 나름의 시공간적 배경들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단어, 문장의 불규칙한 나열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단어의 정의처럼 일정한 줄거리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세계가 형성된다.

 

*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한편의 서사시이자 신화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가족들의 신비한 태몽을 통해 또는 삼신할매의 점지를 통한 탄생으로 시작해서, 드라마틱 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한 온갖 다채로운 사건들로 채워진다. 그 이야기에는 나름의 역정(歷程)이 있고, 플롯이 있고, 맥락과 어떤 흐름이 있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결말은 장담하지 못한다.

 

빅히스토리 장르의 책들에서는 호모사피엔스가 공통된 이야기(신화 등)라는 허구적 실재의 공유를 통해 개체를 뛰어넘어 강력한 사회적 결속력을 발휘함으로써 진화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나'의 이야기는 나를 주인공으로 하므로 내것 같지만, 주된 내용은 주변 대상들과의 상호작용 즉 '관계'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야기는 결국 '나'를 중심으로 한 기억과 관념의 다발들이 그럴싸한 줄거리와 맥락을 가지고 연결된 것이다. 그럴싸하다는 것은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처럼 여겨진다는 것이고, 스틸사진과 같은 개별적 기억과 관념들이 줄거리와 맥락을 통해 매끄러운 한편의 영화처럼 편집된다. 줄거리와 맥락은 이야기 속의 세계관이 되고 그 세계관은 실제로는 모순 투성이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실체처럼 여겨지게 된다.

 

깨달음이란 빈틈없이 완벽해 보이는 나와 타인들의 이야기가 허구임을 자각하는 현상이다. 한편의 영화같은 이야기에서 줄거리와 맥락이 해체되면, 스틸사진 같은 문장들이 남고, 그 문장들의 주어인 '나'가 해체되면, 의미 없는 문자들만 남게 되고, 그 문자들마저 해체되다면?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사고실험을 이끄는 것도 결국 또 다른 '나'의 이야기라는 것.

 

이야기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야기를 도둑으로 몰고 가기 위함은 아니다. 괴로움의 근원이 이야기의 '내용'에 있음을 상기하자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 이야기가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내용을 해석하는 틀이 변하게 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했던 '나'가 이야기 바깥에 대한 간접경험을 통해 주인공이 아님을 자각하게 됨으로써 이야기 전개의 양상이 달라진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언어로 된 개념으로 어떤 연기적 현상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가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이름 붙여진 연기적 현상이라기 보다는, 내 이야기 속 죽음의 내용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가령 곧 죽게 된다는 시한부 판정과 이후 죽음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육체적 고통,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상실 등)에 대한 예측된 내용들이 두려움을 빚는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게 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에피쿠로스의 죽음에 관한 삼단논법이다. 죽음*에 대한 사전적 정의대로 해석한다면 적어도 논리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앞선 주장과 동어반복이지만 결국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란 현상 자체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예측되는 죽음이라는 현상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해석이다.  

 

*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이 글을 '이야기'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게 된 이유는 어제 도반들과의 탁마의 주제가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음이란 연기적 현상에 대해 이름 붙여진 '개념'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를 생각하다가 '이야기의 힘'에 대한 단상이 떠올라 이 둘을 두서없이 연결해 보았다.

 

투박한 결론이지만, 굳이 '나'의 이야기를 황급히 각색할 필요는 없다. 실상에 대한 해석된 내용이므로 실재가 아닌 허구이지만 그 또한 완벽한 연기적 현상이므로. 다만 이야기가 이야기임을 알아 무관해지면 그만이다. 말로만? 아니,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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