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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g Jan 09. 2020

지금만으로 행복해

어떤 깨달음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며칠 되지 않는 방학에 들어가면 집에서 아이를 전담마크 해야하는 엄마들의 고군분투기가 SNS를 달군다. 학기 중에는 갖은 수를 다 써도 꿈쩍 않고 이불 속에서 나오지도 않던 아이들이 방학중에는 귀신같이 일어나 앉아 놀거리를 찾는 아침형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이건 아마 세계 10대 불가사의로 꼽아도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이 기막힌 하루의 시작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하니 그 길고 긴 24시간을 보내야하는 엄마들은 고난의 시작이요, 날마나 실현될 수 없는 육퇴만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출근을 할 수 있으니 등원과 등교와 출근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분주함에서 그나마 좀 벗어날 수 있어 늦잠도 자고 이리저리 늑장을 부리기도 하는 기간이다. 초등학생이라 방학이 한달이나 되는 H에 비해 유치원생인 J의 방학은 단 열흘이다. H는 그 한달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정성들여 시간표를 짜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었지만 J는 여의치 않다. 그래도 연말에는 이래저래 연차를 사용하며 나와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연초에는 그리할 수 없으니 제 형이 제 할일 하러 나가고 나면 J는 오롯이 할머니와 시간을 보낸다. 저녁에 퇴근해 집으로 가보면 그렇게 하루를 보냈을 J가 또 가엾고 안타까워 세배쯤은 더 깊고 진한 마음을 담아 안아주고 비벼주고 만져주며 입을 맞춘다.



2020년 1월 4일 토요일의 공룡 전쟁.



그날의 저녁도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아침 시간만큼 짧은 것이 퇴근 후의 저녁 시간이다. 종일 고모만 기다렸을 J. 일과대로 저녁 공부를 마치고 나면 놀이는 꿈도 꿀 수 없을 심야 시간이 되기 때문에 아쉬움이 뒤섞인 또랑또랑한 눈망울들을 외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시점에 나는 종종 아이들에 지는 선택을 한다. '보드 게임 한 판?!'이나 '댄스 파티?!'를 외치거나 '종이접기?!'를 제안하는 식인데 0.1초만에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터져나온다. 그러고 나면 당연히 11시는 기본으로 넘는다.

그날 어찌나 고단한지 점등을 한채로 앉아서 마시던 캔맥주를 들이켜는데, 내가 눕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H와 J가 물었다.


고모? 뭐해?
으응.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어.



내 대답은 쓸데없이 진지했다. 좀 지친 상태였고 불쑥 진심이 나오기도 했을 것이다. 잠시의 지체도 없이 J는 대답했다.



그래? 근데 나는 지금만으로도 행복한데?!




J의 말에 나는 앉은 채로 얼음이 되었다. 뒤이은 H의 말,



나도 그런데?!



나는 곧바로 양팔을 벌리고 누운 뒤 두 녀석을 겨드랑이에 끼워 흔들어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때가 묻지 않았니, 깨달음을 얻었니, 그러하다니 다행, 천만 다행이다.

사십년 동안 나는 그것만을 찾아 헤매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그 꽁무니도 찾지 못한 것 같은데말야.


행복은 H와 J의 마음 속에, 고모 겨드랑이에 끼어 있는 H와 J의 목덜미에, 어둠 속에서도 햇님처럼 웃는

H와 J의 눈자락에 입꼬리에 드넓어진 콧구멍에. 그래서 시큰해지는 고모의 뜨끈한 가슴에.



2019년 12월 25일 수요일. 크리스마스에 찾은 대천해변. 겨울 바다는 놀랍게 따듯하고 반짝였다.



2020년 1월 5일 일요일. 우리의 겨울방학. H는 열 살, J는 여덟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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