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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Jan 08. 2024

기억, 경도(硬度) 그리고 인간성

단단한 기억, 플래시백

영화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에 대한 학습을 진행해왔다. 영화에서 기억이란 재현이다. 정확한 시각적 재현을 통해 변함없는 과거를 전달하려는 ‘플래시백’이라는 형식들은, 실제 우리 기억의 작동 양태를 위배한다. 인간의 기억은 모호한 것, 그 불투명한 진위를 애써 믿기 위한 하나의 형식이다. 그에 반해 플래시백은 명백히 기계적이다. 이 형식은 당시의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것을 고스란히 재생해 그 진실을 (마치 저널리즘처럼) 전달하려 한다. 특히 영화 전체가 ‘기억의 재생’을 전제하는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이를테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제임스 캐머런의 <타이타닉>은 어떠한가. 현재 시제의 발화자로부터 과거의 이야기를 인양하듯 끄집어 올리는 이 영화들은 그 기억이 진실인가에 대한 의문을 표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이 때 사건의 채취와 그 불변의 재생이라는 형태는 ‘영화 제작’이라는 물리적 행위와 즉시 연결된다. 이를테면 이렇다. 이 영화들은 현재 시제라는 액자를 중심으로 주인공의 눈을 통해 ‘기록’된 사건들을, 정신적 작동을 통해 ‘편집’한 뒤, 증언이나 담화 혹은 상념의 방식으로 ‘재생’한다. 그리고 영화란, 카메라로 ‘기록’된 영상을, 기계적으로 ‘편집’해, 영사 장치 혹은 출력 장치를 통해 ‘재생’되는 일체의 메커니즘을 따른다. 왜 우리는 이 영화들을 보며 그 증언의 진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인가? 그 배경에는 이 영화들이 다루는 기억과 영화의 장치성이 동일하게 작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타이타닉>이 재생하는 과거의 사건은 디재시스적으로 명백한 진실이다. 앞서 말했듯 이는 스스로를 영화 장치들과 일치시킴으로 그 이상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다른 의심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이러한 기록적 기억의 방법론은 그 자체가 기계적이라는 의미에서 ‘단단한 기억(hard memory)’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이 단단한 기억들은 그곳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는 아예 죽은 자의 입을 빌어서까지 이 기억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확고히한다. 흥미롭게도 이 진실은 유령의 것이기 때문에 작중의 그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못한다. 이 유령의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은 스크린 너머의 관객 밖에 없다. 한편 액자식 구성을 통한 진실의 발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플래시백은 대체로 진위 여부에 대해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의 배경을 추적하는 미스테리 장르는 기억의 증언을 통해 과거를 ‘조망하는 듯’한 개방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구성에도 기이한 맹점이 있다. 여기에는 그 기억의 증명 주체가 모호하다는 의문이 도사린다. 탐정들의 ‘추리 쇼’로 절정을 장식하는 영화들, 이를테면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을 떠올려보자.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 해결의 와중에 끼어드는 플래시백은 누구의 기억인가? 사실을 추리해낸 탐정 블랑이 떠올린 상상인가, 아니면 그의 이야기를 들은 범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친 기억인가? 그 자리에서 탐정의 연설을 듣는 이들의 눈앞에 조차 아른거리는 이 영상의 진위는 어째서 도전받지 않는가? <선셋 대로>는 도달할 곳이 모호한 증언에, <나이브스 아웃>은 발생처가 모호한 증언에 진실이라는 힘을 부여한다. 이 둘 모두에게 작동하는 유일한 장치는 플래시백이라는 방법론 뿐이다. 결국 이 ‘단단한 기억’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실로만 연결된다는 사실을 공유한다.


이들의 확고한 진실성이 기계적 성질과 연결된다는 점을 떠올리자. 확고한 진실성과 기계적 성질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불가분의 관계다. 이 기억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기계적이며, 한편 기계의 작동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진실이다. 기계의 또 다른 작동을 연상시키는 영화로는 박찬옥의 <파주>를 들 수 있다. 상영 시간 대부분을 채우는 플래시백 시퀀스는 주인공 은모가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시작된다. 이 사이렌 소리는 당연히 기억의 재생을 작동시키는 버튼, 스위치 혹은 명령어와 다름이 없다. 많은 ‘단단한 기억’들은 이렇듯 재생 버튼에 준하는 어떠한 명령어를 지니며, 어김없이 진실의 편린으로 규정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명령어가 있기 때문에 진실한 셈이다. 린 램지의 <케빈에 대하여>의 주인공 에바 역시 수많은 ‘버튼’들을 통해 아들 케빈의 기억을 재생한다. 이 때 우리가 이 재생되는 영상들을 의심한다면 이 영화들의 작동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이 버튼 혹은 명령어들은 기억들이 기계적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함으로 의심의 가능성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 곳에 놓여져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 단단한 기억들은 그 자체가 영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치를 통해 완성되는 물리적 개념의 ‘영화’다. 그렇다면 영화 역시 단단한 기억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것 아닐까? 영화 내부에서 재생되는 기억의 방식과 일체화함으로 스스로가 ‘무엇’이라고 말하려는 것 아닐까? 이러한 질문은 즉시 코고나다의 <애프터 양>과 연결된다. 코고나다는 단단한 기억 그 자체에 생명력을 준다. 일종의 육아 도우미 로봇인 양이 갑작스러운 오류로 쓰러진다. 양의 입양자인 제이크는 그의 내부에 비밀스러운 메모리 뱅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통해 양의 기억을 열람한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영화 만들기와 영화 보기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제이크가 열람한 양의 메모리가 영화의 내부에서 물리적으로 투사될 때, 이는 관객들에게는 단단한 기억의 플래시백으로 인식된다. 무엇보다 양에게 기록 장치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는 한 이 기록은 결코 의심할 것 없는 진실의 편린으로 규정된다. 양은 영화 장치, 양의 메모리는 단단한 기억이며 단단한 기억은 의심할 것 없이 영화다. 따라서 양은 영화의 현신이다. 코고나다의 이러한 규정은 하나의 낭만화를 목적으로 행해진다. <애프터 양>은 양이 기록장치라는 사실과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연결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낭만적인 연결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양이라는 존재를 통해 ‘기계적이기 때문에 인간적’이라는 역설을 확인한다.


이 역설이 <애프터 양>을 통해 창발된 아이디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차라리 지금 양이 ‘영화’ 스스로가 도달하고 싶은 목표지점을 명백히 한다고 하는 편이 낫다. 단단한 기억들은 의심이라는 작동을 회피해 어디에 도달하려 하는가? 그 목적지에는 기쁨이나 환희, 감동, 놀라움, 도덕성, 공포같은 인간적 감정으로 가득 차있다. 그렇다, 규정의 핵심은 ‘인간적’이다. 이 플래시백(=단단한 기억)들은 정념의 존재인 인간을 향한다. 양을 인간의 영역으로 포섭하려는 그 의지는 영화 역시도 그 내부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과 연결된다.


물렁한 기억들과 생성

하지만 단단한 기억은 결국 기억의 경도(硬度)를 선별하지 않는가. 플래시백이 의심을 담지할 때, 그것은 항상 비인간적인 개념으로 규정되곤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동일한 사건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다른 기억들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단단한 기억이 없으며 따라서 불안하다. 그리고 이 불안이야말로 모종의 역설이다. 우리는 이런 기억의 불완전성, 주관성, 의심으로 가득찬 성질을 인간 내면의 불안함, 통제 불가능한 욕망, 인간성의 상실 따위와 엮어버린다. 우리가 단단한 기억의 영화들을 보며 안정되고 확고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불안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기 떄문이며, 우리는 그 단단함에 매료된다. 따라서 <라쇼몽>의 분열된 기억들은 이상적인 형태로서의 단단한 기억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로 규정된다. 이러한 회로 내부에서 단단한 기억은 하나의 이상적 형상에 등극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사회적 혐오의 형성 배경에 있어 ‘단단함’에 대한 이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논한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사회의 분위기에 대해 “(강철과 기계 이미지로 칭송되던) 순수한 독일 남성의 깨끗하고 안전한 건장함은 여성-유대인-공산주의자의 유동적이고, 악취나는 더러움과 대비되었다.”(「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라고 말한다. ‘강철 사나이들’로 대표되는 강건한 몸에 대한 이상화는, 부드럽고 취약한 것의 배제로 연결되며 혐오라는 개념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단단함은 곧 완전함과 결부하고, 완전함은 쉽게 이상적 모델이 된다. <애프터 양>의 양이 단단한 기억을 가장 낭만적이고 이상적 개념까지 끌어올렸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흥미롭게도, 양은 그가 인조인간이라는 점에서 단단한 육신마저 지니고 있다. 양은 단단한 기억과 단단한 육신을 지닌 가장 이상적인 영화 기계다. 그는 마치 이상적인 영화-존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이 시점에서 기억의 본위적 성질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기억이란 ‘단단한 기억’인가? 즉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언제나 영화적 기계성(촬영-편집-재생)을 따라 움직이는가? 인간의 기억에는 사건이라는 원본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원본의 사건을 편이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기억은 오직 인간의 심상 내부에서 부정형의 환영으로 구성되며, 물리적 구현을 위해서는 언어라는 매개를 작동시켜야만 한다. 마이클 알메레이다의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에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할 때, 우리는 그 원본이 아니라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대사가 존재한다. 기억이란 객체들의 정신 내부에서 끝없이 반복되고, 풍화되며, 그 와중에 변형하기도 한다. 진실 그 자체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 기억들은 불완전하고 주관적이며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라쇼몽>을 볼때의 그 불안이 오히려 우리 기억의 작동 양태와 더 닮아있다. 따라서 이들은 결코 단단할 수 없다. 단단한 기억이란 오로지 꿈에만 존재하는 이상적 형태다. 우리 기억은 물렁(soft)하다.


따라서 <라쇼몽> 혹은 알랭 레네의 <지난 해 마리 앵버드에서> 같은 영화들은 ‘물렁한 기억(soft memory)’을 재생하고, 불안을 생성해낸다. 그런데 이들이 기반으로 삼는 광학적 메커니즘은 단단한 기억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기록하고, 편집하며, 재생한다. 그럼에도 이 ‘물렁한 기억’의 영화들은 재생의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기억이란 철저하게 주관적 경험의 결과물이라 주장하는 셈이다. 우리가 이들에게서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이들이 단순히 불명확한 기억을 재생시키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이들은 이들이 몸담고 있는 기계적 현상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렁한 기억은 결코 영화 장치의 작동과 일치시킬 수 없다. 이 기억들은 자신들은 기록된 ‘원본’과 재생된 ‘투사물’은 달라질 수 있다고 끝없이 주장하며, 카메라의 작동 메커니즘 자체를 부정한다. 물렁한 기억의 영화들이 부정하는 것은 인간세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신들이 영화 장치로부터 탄생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물렁한 기억의 메커니즘을 설명할 다른 개념을 찾아내야 한다. 이 때 이러한 기록-투사물의 격차를 이해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변형의 방식이다. 요컨데 기록이 기억이라는 저장을 거치며 풍화했다는 해석이다. 이 방식은 이해하기는 쉽지만 ‘단단한 기억’이 가지는 이상화의 함정을 피할 수 없다. 즉 원본은 ‘객관적 진실’일 뿐, 그것을 멋대로 출력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이라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더 명백한 기억’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확고한 위계가 형성되며, 이 위계에선 단단한 기억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 이 회로는 한편으로 더 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숭배의 회로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를테면 <라쇼몽>은 부정한 인간들의 변형된 기록일 뿐이며, 우리는 더 완벽한 기억을 재생할 수 있는 ‘더 완벽한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는 트랜스 휴머니즘적 인식으로 읽힐 수 있다. 이 방식은 또한 물렁한 기억을 단단한 기억의 내부에 종속시킨다는 점에서 물렁한 기억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 조차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물렁한 기억을 독자적으로 이해하기에 불가능한 방식이다. 또 다른 방식은, 생성의 방식이다. 이 방식에서 기록의 자리에는 입력이 위치한다. 사건은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사건을 확고히 인지하지 못한다. 기록이 아닌 입력이 있을 뿐이며, 기억이라는 방식을 경유해 저장한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기계적 기록이 아니라 데이터로서 ‘기입’된 것이다. 이 형식은 인공지능의 이미지 생성을 그 모델로 삼는다. 사용자의 입력에 따라 발생하는 이미지, 하나의 원본이 아니라 다수의 원본’들’을 갖는 이미지, 궁극적으로 원본들로부터 추출과 합성을 거쳐 출력된 이미지야말로 우리 기억에 대한 조금 더 명확한 모델이 되어줄 수 있다. 따라서 이 기억들은 값(=사건)을 입력받아 데이터베이스화 한다. 그 뒤 ‘시간’과 ‘자아’라는 필터를 통해 형성된 프롬프트를 통해 최종적 이미지로 출력해낸다. 물론 이 주장이 지나친 기계론에 대한 복종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진짜 인간’의 기억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유념하라.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라는 기억에 대한 논의다. 단단한 기억과 같은 기반, 즉 영화는 ‘장치의 작동’이라는 전제를 따른다. 즉, 우리의 기억과 더 유사한 ‘물렁한 기억’은 어떻게 기계화하는가. 그것은 입력-필터링-생성의 메커니즘을 따르며, 단단한 기억의 그것(기록-편집-재생)과는 명백히 다르다.



비간의 두 영화, <카일리 블루스>와 <지구 최후의 밤>은 정확히 이 물렁한 기억을 그린다. 이 두 영화에서는 기억의 원본, 기억을 둘러싸는 액자를 인지할 수 없다. 차라리 이들은 입력받는 프롬프트에 따라 절차없이 이미지들을 생성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시간의 운행은 혼잡하고, 서로다른 인물이 같은 이미지(배우)로 그려지기도 한다. 단단한 기억의 순행 논리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 기억들의 논리는 오로지 생성값을 입력한 자, 기억을 되살리려는 자의 그것을 따를 뿐이며 따라서 ‘원본 소스’와는 다른 무언가를 출력해버린다. 그야말로 재생으로는 부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작동 양태다. 특히 이 두 영화의 2부를 구성하는 롱테이크 파트는 ‘소스의 뒤섞임’의 극치다. 실제의 시공간적 감각과 일치되는 이들은 분명히 원본의 경험과 가장 흡사한 ‘감각’을 전달한다. 그럼에도 이 시퀀스 내부의 모든 요소들은 시공간적 경험의 원본성을 흔들고 혼란만을 전달해준다. 1부에서 제시하던 편린적인 기억(=소스)들은 여기서 뒤섞이기만 할 뿐, 그 어떠한 고정된 진실로 축조되지 않는다. 그렇다, 이들은 차라리 혼란을 더 가중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기억에 더 가까운 ‘물렁한 기억’의 본질인 것이다. 특히 <지구 최후의 밤>의 2부, 3D라는 감각적 일치까지 작동시키는 생성 이미지, 아니 생성 감각이야말로 물렁한 인간 기억에 대한 가장 정확한 재현이다. 이러한 사실이 다시금 물렁한 기억의 역설에 도달한다. 단단한 기억은 그 자체를 영화와 일체화 시켜 이상적인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준다. 이는 안정적이고 아름답지만, 결코 인간 기억의 작용을 재현해내지는 못한다. 반면 물렁한 기억은 인간의 기억 작용에 더 가깝겠지만, 장치적으로 영화의 그것과 결부하지 못한다. 물렁한 생성 이미지의 작용이기에 기록-편집-재생의 프로세스로부터 한참 이탈해버린다. 그런 면에서 물렁한 기억을 다루는 영화들은 정신과 육체의 작용이 엇나버린 기이한 존재처럼도 보인다. 


단단한 육체와 기억들

그런데 때때로 영화는 이와 유사한 대상물을 영화의 내부에서 재현하기도 한다. 물렁한 기억과 단단한 육체의 결합물을 그린 대표적인 영화라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에이아이>가 있을 것이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이러한 현상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 두 영화에는 모두 기억이라는 소스를 통해 ‘성성’된 존재들이 등장한다. <솔라리스>의 ‘방문자’인 크리스의 아내 하리(의 생성물)는 그야말로 물렁한 기억의 결정체다. 크리스의 기억을 소스로 생성된 이 존재는 이미지라는 한계를 넘어 물질적으로 구성된다. 하리는 원본의 소스를 그대로 재현하는 재생의 이미지가 아니라 소스로부터 선별되고 취합된 조건들(=프롬프트)를 따라 만들어졌다. 이 존재는 원본이되는 여성 하리와 완전히 유사한 외모를 취하고 있지만, 크리스는 그 존재로부터 조금씩 차이를 감지한다. 이때 그 재생물이 원본과 지나치게 닮았다는 사실이 차이의 감지를 활성화한다. 이 물렁한 버전의 하리는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언캐니’다. 이것이 크리스가 (생성물인) 하리를 죽이기 위한 행위를 끝없이 반복하는 이유가 된다. 잠시 이 하리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 등장하는 주디=매들린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수 있다. 왜 <현기증>의 퍼거슨은 <솔라리스>의 크리스와 달리, 주디에게서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것은 주디가 결국 매들린이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 아닐까? 요컨데 물렁한 기억의 생성물인 하리와 달리 주디는 원본 그 자체와 동일한 존재다. 메커니즘적으로는 그저 기록-재생된 존재와 다름이 없는, 단단한 기억의 존재다. 따라서 <솔라리스>의 하리는 주디=매들린에 대한 반명제적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크리스의 하리에 대한 끝없는 거부감은 그 존재가 생성물이라는 사실을 제거하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두번째, <에이아이>에서 생성된 모니카는 또 다른 위치를 점하는 존재다. 데이비드의 기억으로부터 생성된 모니카는 데이비드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존재이며 동시에 데이비드가 ‘인간’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지표다. 따라서 모니카의 생성물은 <애프터 양>에서 메모리 뱅크와 동일한 기능을 하는 셈이다. 똑같이 기억이라는 프롬프트로부터 생성된 이 두 존재가 이렇게 다르게 기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크리스와 데이비드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 두 존재는 다른 육체, 즉 ‘단단함’의 차이를 가진다. 로봇인 데이비드는 단단한 육체(=장치)를 가진 존재이며 따라서 그의 기억은 ‘입력’이 아니라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생성된 모니카는 원본 모니카와 명백히 다른 존재라는 사실이 <에이아이>의 엔딩의 핵심이다. 즉, 모니카는 ‘입력’이 아닌 ‘기록’을 통했음에도 원본과는 다른 ‘생성물’이 된 조금 더 복잡한 존재라는 이야기이다. 이 복잡한 교차지점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교롭게도 모니카를 ‘생성’해낸 존재들은 미래의 지성있는 기계(mecha)로 설정되어 있다. <솔라리스>의 가이아적 설정, 행성의 바다가 생성을 주도한다는 특성과는 정확히 반대된다. <에이아이>는 물렁한 기억이 인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기피하지 않으며, 그러한 ‘영역’에 기계(=데이비드)가 도달했다는 사실을 하나의 초월상태로 그린다. 즉 모니카의 원본을 제공한 데이비드는 물렁한 정신(=인간의 것)과 단단한 육체(=기계의 것)을 가진 복합체(=사이보그)로 규정된다. 생성된 모니카의 사랑한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는 데이비드의 쇼트는 그가 완전한 기계로부터 이탈했다는 사실을 확고히 한다. 즉 <에이아이>는 단단한 기억의 영화들과 달리, 물렁한 기억을 ‘인간성’의 대표로 이상화한다. 그리고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로 단단한 육체의 데이비드를 거론하며, <애프터 양>의 작동을 뒤집는다. 요컨데 단단한 육체가 단단한 기억을 통해 인간적 영역에 도달하는 양의 여정과 완전히 반대로 움직이는 셈이다. 다만 과정에 있어서 역행하고 있을 뿐, <에이아이> 역시 이상화의 문제지점을 공유한다. 요컨데 ‘인간적’이라는 하나의 이상적 지표로 흘러들어가는 회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것이다.


마이크 코켈버그는 「뉴 로맨틱 사이보그」에서 기술주의와 낭만주의의 결합을 논한다. 그는 기술이 재주술화와 신화화라는 기재를 통해 낭만성을 획득하려 시도하며, 그것을 위해 기술이 일시적 필요성을 필요로 한다 주장한다. 아서 C. 클라크의 그 유명한 발언을 경유한다면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육체가 물렁한 기억과 만나 순식간에 인간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마법이다.(“파란 요정님, 제발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세요.”) 어떤 면에선 양의 조건(단단한 육체와 단단한 기억)이 인간성으로 연결되는 것보다 훨씬 주술적이며 신화적일 수도 있다. 물렁한 기억을 가지는 안드로이드는 복합체(=사이보그)로 변모해 인간성 획득을 신화의 영역에 까지 가져간다. 이 때, ‘인간적’이라는 타이틀은 여전히 영화 장치에 있어서 신화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결국 기계 육체와 기억을 다루는 영화들은 한결같이 위계를 설정하는 중이다. 이들은 기억의 가능성과 영화의 관계를 통해 인간성 획득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그 유명한 제목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꿈이다. 꿈과 물렁한 기억은 등치되며, 따라서 이 제목은 기계의 인간화에 대한 직설적 질문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 질문 자체가 인간성의 규정과 위계 설정을 동시에 작동시킨다. 안드로이드는 물렁한 기억을 가질 수 있는가? 가진다면 인간과 같아지는가? 여기서 인간은 꿈=물렁한 기억과 같은 위계로 정립된다.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그것이 본래 불가능하다는 조건과 더불어, 따라서 그 목표지점은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만든다. 그런데 한편 ‘꿈의 공장’이라 불리우는 할리우드는 단단한 기억의 영화를 더 많이 생산한다. 할리우드가 꿈이라는 정신성보다는 공장이라는 기계 육체에 더 많이 귀속되어 있음을 알리는 사실 아닐까. 오히려 그렇기 떄문에 물렁한 기억(=꿈)에 대한 찬미가 생산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가장 마지막에 기억한 그 때를 기억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에는 이상한 회상이 두 번 삽입된다. 이 영화는 알츠하이머를 겪고 있는 마조리와, 그의 증상을 보조하기 위해 설치된 남편의 형상을 한 AI 월터 프라임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두 사람이 과거에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보고 돌아오다가 월터가 청혼했다는 이야기를 마조리에게 들려준다. 첫번째 이상한 회상은 이 기억에 대한 플래시백이다. 이 플래시백에서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과 청혼이라는 이벤트는 월터 프라임의 서술과 동일하다. 하지만 그들이 영화를 보고 청혼한 장소는 극장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있던 침실이다. 이 플래시백의 전후로 마조리의 쇼트가 삽입되기에 이 회상은 확실히 마조리의 것이다. 두번째 플래시백은 마조리가 딸 테스와 사위 존에게 해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마조리는 젊을 적 남편과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 깃발이 가득한 풍경을 봤다 말하고, 이 이야기는 다시금 존에 의해 월터 프라임에게 전달된다. 이 장면의 플래시백 역시 앞선 증언과 차이점이 생긴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장소는 공원 벤치가 아니라 집의 소파이며, 그들이 보는 광경은 TV의 뉴스 장면이다. 이 두번째 플래시백은 갑작스럽게 삽입되며, 전후의 쇼트와 맥락적으로 맞닿지 않아 회상의 주체를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 회상들은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다. 두 사건 모두 발화와 이미지로 전달 되었으며, 둘 중 어느 쪽이 과거의 사건이고 어느 쪽이 회상인지 확신이 불가능하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작동한다. 또한 첫번째 플래시백의 회상 주체인 마조리조차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기에 기억의 두 가능성(재생 혹은 생성)에 대한 확신이 불가능하다. 두 개의 발화와 두 개의 이미지, 이 중 어느 쪽이 기록-편집-재생의 기억일까? 아니 이 안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양쪽 모두 입력-필터링-생성된 것일 가능성은 어떠한가? 이 펼쳐진 가능성 내에서 더이상 재생과 생성은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철저한 원본성을 지켜야하는 쪽은 단단한 기억, 즉 재생이다. 기억에 관한 위계들이 전부 무너져내리면 단단한 기억은 그 힘을 잃어버린다. 이 때 가능성으로 남는 것은 오직 물렁한 기억 뿐이다. 여기에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 뿐만 아니라 기억 주체의 가능성도 섞어버린다. 두번째 플래시백의 회상 주체는 누구일까? 기계 육체를 가진 월터 프라임 혹은 다른 인공지능일까? 아니면 아직 살아있던 때의 마조리가 떠올린 회상을 뒤늦게 가져온 것일까? 가능성의 영역에서 기계 육체와 인간의 육체가 뒤섞인다. 이 사고의 내부에서 물렁한 기억을 이상화하던 그 전제조건 조차 완전히 불식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이분화된 기억의 분류, 즉 단단함과 물렁함을 완전히 제거해버린다. 이 소멸은 곧 위계의 소멸이다. 이 영화는 인간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매료를 제거하고 오직 기억이라는 소자만을 문제에 둔다. 월터 프라임과 다른 인공지능 모두 인간이 되고 싶은 의지로 기억을 이용하지 않는다. 육체의 문제와 무관하게, 모든 기억은 물렁한 상태로 존재한다. 마치 그것이야말로 기억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 처럼.



어쩌면 이 상태야말로 영화 장치가 기억을 규정할 수 있는 가장 신비로운 경지일 수 있다. 영화가 장치로 남아있는 한, 기억의 본질적 속성(=물렁함)과 끝없이 불화할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때때로 기억을 장치의 영역으로 재규정해(=단단한 기억) 그와의 일치를 꿈꾼다. 혹은 그것을 인간성이라는 도달 불가능한 초월의 경지에 놔두고(=물렁한 기억) 그에 도달하는 꿈을 꾼다. 이 두가지 모두 물렁함을 영화 기계가 소화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화 장치의 한계 지점에 대한 복종의 표시다. 그런데 오히려, 영화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물리적 규정들로부터 이탈할 필요가 있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에서 기억은 오직 영화적인 개념 혹은 역량으로만 작동한다. 재생의 양식, 버튼, 기계적 생성 모두 이 영화의 기억을 도해해내기에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생물적 육체와 기계적 육체 모두 영화의 역량에 흡수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는 것이, 위계성으로부터 이탈하는 길일 수 있다. 발화 주체의 비정확성, 발화 내용의 불확실성이 일시에 작동하는 순간, 기억은 단단함과 물렁함 양쪽을 함께 지니는 양자적 개념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장치성과 정신성을 모두 영화라는 가능성 내부에 기입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인조인간 ‘레플리컨트’를 위해 가상의 기억을 만드는 메모리 메이커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이들은 명백히 영화의 촬영 현장같은 홀로그램을 만들고, 그것을 매체적으로 기입해 기억을 생성해낸다. 빌뇌브는 레플리컨트의 만들어진 기억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촬영-편집-재생의 메커니즘을 따르는 것 처럼 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다시금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의 기억 문제로 귀환해보자. 최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증언하는 로이의 대사는, 그것이 플래시백으로 재생되지 않았기에 훨씬 독보적인 기억으로 남는다. 단단한 육체를 지닌 로이가 오직 언어라는 도구만으로 기억을 나열할 때, 이 기억은 관객들의 머리를 통해 생성될 뿐이다. 로이의 발화는 단단하지도 또한 물렁하지도 않은 어떠한 영역에서 구축되는 양자적 기억이다. 애매한 허공을 향하는 로이의 눈은 무언가를 ‘보고’ 있으며, 그의 입은 너희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을 ‘봤다’ 증언한다. 하지만 이 씬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서 어떤 이미지가 생성되었다면 그것은 장치의 효과가 아닌, 현상의 힘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우리의 물렁한 기억 작동과 연결되는 가장 확실한 통로일지 모른다.


메모리 메이커인 아나는 레플리컨트 K의 가짜 기억을 기억 재생 장치를 통해 훑어보고는, 이 기억은 누군가가 진짜로 겪은 기억이라며 눈물을 흘린다. 아나의 눈물과 로이의 눈물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아마 그 뇌 혹은 연산 장치의 작동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저 <블레이드 러너 2048>이 성급했을 따름이다. 차라리 객석에 앉아있던 우리가 케이의 기억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그 기억이 ‘단단한 기억’이 아니었다면 이 눈물 역시 양자적 작용처럼 보였을 터이다. 이것이 장치적 영화가 도달하게 된 기억에 관한 한계지점일 것이다.


※ 본 원고는 2023 대한민국 예술원 영상예술 비평 공모에 제출되었던 원고이며, 배포자료인 「공모 당선작 평론집」에서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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