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현 감독의 1주기 추모 상영에서 <얼굴들>을 뒤늦게 본 뒤, 얼마 되지 않아 파블로 베르헤르의 <로봇 드림>을 보게 되었다. 베르헤르의 각색이 원작인 사라 바론의 만화 <로봇 드림>과 크게 결별한 부분은 인식가능한 세계를 설정했다는 점에 있다. 사라 바론은 어디진지 모를 미국의 도시라는 느슨한 세계를 동원하는 반면, 베르헤르는 명백히 8~90년대 뉴욕으로 추정되는 세계에 원작의 이야기를 안착시킨다.
잠시 <얼굴들>의 이야기를 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다소 흔한 논평은 제목에 비해 영화에 그다지 (쇼트 개념으로서의)‘얼굴들’이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얼굴의 지평에 대해 묻는 것은 정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구태의연한 접근처럼도 보인다. 사실 영화는 정확히 그 지점에 대해서 언급하고는 하는데, 예를 들어 ‘어떠한 얼굴이라도 기억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진우를 쫓던 카메라가 잠시 그 뒷통수를 이탈해 시장의 풍광을 바라보는 부분에서 그렇다. 여기서 발화로서의 얼굴과 풍광으로서의 시장은 적절한 몽타주를 이룬다. <얼굴들>에서 ‘얼굴’은 얼굴로 호명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집합처럼 다루어진다.
다만 하나의 개념을 인식의 가능성으로 치환하면 모든 것이 ‘얼굴’이 되어버리는 불안이 발생해버리고 만다. 규정의 시발은 탈락으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무엇은 얼굴이고 무엇은 얼굴이 아닌가.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인식의 유한성과 기록의 무한성을 어느 정도 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한다. 요컨데 생화와 조화에 관한 짧은 담화는 즉시 (조화인지 생화인지 모를) 꽃의 촬영 현장으로 점프한다. 말하자면 ‘여기도 많이 변했다’고 말하는 기선과 ‘모든 얼굴을 인식할 수 있다’는 진우의 언어는 상호 충돌한다. 인식한다는 것은 과연 대상의 균일성에 대한 인지인가? 택배기사 현수는 차의 화물칸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다가 한 여인이 기록한 하루의 글을 읽기 시작한다. 그 뒤로 그 기록을 재생하는 영상과, 글을 쓴 여자의 남편과 닮은 지명수배 사진과, 그가 꿈꾸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어떠한 남자의 얼굴이 연속으로 몽타주된다. 몽타주는 마치 이 세 개의 얼굴들을 하나의 인식처럼 연결시켜 놓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각기 다른 세 개의 얼굴들일 뿐이다. 도리어 얼굴은 균일로부터 이탈할 때, 요컨데 상호간의 차이에 대해 인지할 때 얼굴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각기 다른 개체들의 얼굴에 대한 감각이 아닐 때, 하나의 개체로부터 얼굴을 추징해내야 할 때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감각은 변화에 대한 인지다. 크게 빙 돌아왔지만, 결국 얼굴은 변화를 담지할 때에야 얼굴로 작동하는 셈이다.
따라서 <로봇 드림>에서 베르헤르는 현재의 뉴욕과 만들어내는 상이성의 감각을 위해 구태여 ‘과거의’ 뉴욕을 그곳에 배치시킨다. 여기에 이러한 과거의 뉴욕과 함께 재생되는 것은 베르헤르의 과거를 이루고 있을 그의 시네마적 환상들이다. 도그가 핼러윈 분장을 벗겨낼 때, 물을 쏟아내는 샤워기의 쇼트와 가짜 피가 수채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쇼트는 명백히 <싸이코>의 그것이다. 또한 봄에 날릴 연을 사기 위해 들른 차이나 타운의 어떠한 가게는 즉시 <그렘린>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스페인에서 태어났지만 NYU에서 영화에 대해 수학한 그에게 있어 뉴욕은 영화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찬 공간이다. 베르헤르는 그렇게 뉴욕의 ‘몸통’을 시네마의 이미지로 구축한다. 하지만 이런 씨네필적 기억들은 결코 한 도시의 얼굴이 되어줄 수 없다. 따라서 베르헤르는 정확히 뉴욕의 얼굴이 될 하나의 이미지를 가져다 놓는다. 지금의 뉴욕과 상이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오브제로서의 세계무역센터 건물 말이다.
베르헤르는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을 이 영화의 주제가처럼 사용한다. 이렇게 직접적인 힌트가 또 있을까. ‘Do you remember, September’라는 질문은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지속적으로 몽타주된다. 뉴욕의 9월과 쌍둥이 형태의 빌딩은 명백히 하나의 군집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하나의 우정에 관한 소극이었던 사라 바론의 원작은 여기서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복잡한 찬가로 달리 기능하게 된다.
다만 바로 이 지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 감각은 온전히 뉴욕의 얼굴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기능한다. 요컨데 뉴욕의 9월과 변화로서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 세계무역센터는 인물보다 뒤켠에 있어야 할 비가시적 층위의 무언가가 될 수 밖에 없다. 베르헤르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개의 쇼트에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확고히 가시적인 대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로봇의 손, 춤추는 라스칼과 로봇의 이미지가 프레임에 끼어들어오며 세계무역센터는 다시금 후경으로 밀려나버린다. 따라서 뉴욕의 얼굴을 인식할 수 없는 관객들에게 있어 이 영화는 도그와 로봇의 애틋한 사랑의 드라마로 확고히 규정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계무역센터는 (‘그림’이라는 소멸하지 않을 위상의 무엇으로서) ‘거기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로봇 드림>의 마지막 두 쇼트를 보고 바로 떠오른 것은 로버트 저메키스의 <하늘을 걷는 남자>다. 하지만 거의 직접적인 발화를 통해 세계무역센터를 전경까지 꺼내왔던 <하늘을 걷는 남자>와 달리 <로봇 드림>은 그것을 영원히 배경의 층위에서 인양하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을 보다가 문득, 모든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는 진수의 뒷모습으로부터 도시의 풍광으로 연결되는 그 쇼트를 떠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얼굴이 되기 위한 조건은 그것이 어떠한 레이어 위에 올라와 있어야 하는지와 무관한 것이다. 뉴욕이라는 세계(꼭 그것이 물리적 세계를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의 주민에게 있어 <로봇 드림>의 얼굴은 층위와 무관하게 영원히 그곳에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