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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 Mar 08. 2024

토리야마 아키라의 부고에 부쳐

토리야마 아키라 작가론이 될 수 있는 일말의 아이디어 혹은 상실감


토리야마 아키라의 부고에 대해서는 방금 막 들은 참이다. 떠올려보면 나는 지금까지 작가의 죽음에 대해 써본 일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라는 존재가, 그들의 작품보다도 더 실제감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득, 토리야마의 죽음에 대해 전해듣고 나서는 더없는 실제감을 느꼈다. 미우라의 타계 때에도, 마츠모토의 타계 때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드래곤볼 키드’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 출생인 나에게 있어 <닥터 슬럼프>와 <드래곤볼>은 강력한 또래 문화로 작용했다. <드래곤볼>은 나의 10대 시절과 거의 평행적으로 연재를 시작해 끝마쳤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비디오 게임사(史)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이를테면 패미컴의 <드래곤볼 Z : 격신! 프리저> 부터 시작해 PS2의 <드래곤볼 Z 스파킹! 메테오>까지, 거의 쉬지 않고 플레이해왔다. (나의 스팀덱에는 아무렇지 않게 <드래곤볼 제노버스 2>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서, 나는 토리야마 아키라와 실제감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어떠한 강력한 연결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저 토리야마 아키라를 어떤 작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의외로 심플할 수 있는 이 질문은 매우 답하기 어려워진다. 토리야마 아키라를 (작가주의적인 관점에 입각해) 한 명의 ‘작가’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실제로 작업한 작품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작품에서 어떠한 독립된 자의식을 발견하기가 매우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상할 정도로 기술적으로 뛰어나지만, 이상할 정도로 어떠한 ‘정신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드래곤볼>을 정치적이거나 철학적으로 독해하겠다는 이야기는 (그 결과물의 훌륭함과는 무관하게) 약간 도가 지나친 농담처럼 들린다. 오히려 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과 칸 사이의 연결방식, 칸의 크기에 따른 인식의 점도, 시선의 무중력적인 배치 따위에 대해서 말해야만 한다.


차라리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토리야마 아키라는 지상(紙上)의 물리력을 가진 작가라고. 그를 하나의 작가로 규정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면의 위에서 감각되는 강력한 물성에 있다. 이 물리적 성질이 가지는 무게는 어마어마하기에, 호조 츠카사가 카오리의 망치에 1t 이라고 적어 놓는 것을 우습게 만든다. 토리야마가 ‘더 효과적인 격투씬을 그리기 위해’ 손오공을 성장시켰다는 일화는 지나치게 유명하다. 이 때 손오공이 성장함으로서 생기는 에너지는 그의 ‘팔과 다리’가 늘씬하게 늘어났다는 점에 있다. 이 변화는 어떠한 플롯상의 지점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오공이 행사하는 원심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다. 그래서 <드래곤볼>의 물리력에는 두 개의 축, 말하자면 실재감을 주는 물리적 에너지의 충돌과 더불어, 비실재적인 (그러니까 중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버린) 각 칸의 시점의 배치라는 동시적 양태가 작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드래곤볼>은 완전한 뉴튼적 만화나 다름이 아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의 출세작인 <닥터 슬럼프>는 그러한 물리적 힘을 지면에 종속시키는 만화였다는 점이다. 주인공 아라레의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세계의 멸망을 발생시키지 않는 배경에는 <닥터 슬럼프>가 지면 위의 그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있다. 아라레의 주먹으로 쉽사리 반으로 쪼개져버리는 지구는 그것의 비현실적 묘사 덕분에 언제든 (반창고 등을 이용해) 원상 복구가 가능하다. 이 종이라는 물성에의 지배 덕분에 <닥터 슬럼프>는 작품이 가진 엄청난 물리력의 표출에도 불구하고 실없고 한가한 농담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토리야마의 작품군을 보자면, 토리야마의 취향은 이쪽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내가 토리야마의 부고에 대해 ‘실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린다. 여기서의 실감은 물리적 힘의 체감과 등치된다. 따라서 그를 잃었다는 공허함은 그가 일본 만화사의 위대한 작가였다는 사실에서만 비롯되는 것만은 아닌 듯 하다. 토리야마를 잃었다는 것은 그가 지면 너머라는 다른 차원에서 발생시킨 충돌적 에너지들의 상실로 연결된다. ‘내 손에는 태양계 전부를 파괴할만한 힘이 담겨져 있다.’는 대사를 온전히 실재적 체감으로 만드는 그 에너지의 상실 말이다. 말하자면, 토리야마 아키라가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우주 규모의 힘도 함께 소실되었다. 한 세계의 상실을 이토록 크게 물리적으로 감각한 일은 처음인 것 같다.


(너무 이른 글인 것 같지만, 그래도 만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글을 쓰는 것 뿐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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