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Apr 13. 2022

듣기 좋은 말

예전에 그런 날이 있었다. 괜히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던 날. 그날 나는 어떤 모임에 나갈 계획이었고, 그 모임은 사교를 위한 것이 아닌, 내가 과제를 발표해야 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약속된 일을 해야 했기에 그런 모임에서조차 최선을 다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 기분 좋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아이섀도를 발랐다. 왠지 눈 화장을 하면 기분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누구한테 잘 보일 일도 없었지만, 그냥 정성스레 화장을 했다. '호박에 줄 긋기'랄까. 뭐 약간의 화장으로 내 미모가 급상승하고 그러진 않았겠지만, 나는 한껏 기분을 내 보기로 했다. 


나는 아침에 기분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다. 잠도 썩 잘 자지 못하고 아침엔 퉁퉁 붓는 편이라, 평생 야식도 별로 먹어본 적 없을 정도로 아침 컨디션은 맨날 꽝이다. 그럼에도 그날은 참 기분이 좋았다. 


그다지 잘 보일 일은 없었지만,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던 그 모임에 나보다 한두 살 많은 언니가 한 명 있었다. 그 언니 말고는, 그 언니 남친을 포함한 모두 남자만 있는 그런 모임이었다. 그 언니는 그날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말했다. "너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을 다했어? 호호호" 


나는 그냥 말했어야 했다. 그냥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서 한번 발라봤어요. 그냥 어젯밤에 꿀잠을 자서 기분이 좋았나 봐요..라고. 

하지만 나는 충격을 먹고 화장을 끊었다. 


아니면, 그렇게 얘기했었야 했나? 언니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죵~ 이렇게 애교 섞인 말투로? 그러기엔 나는 너무 어렸고 능청이 없었다. 


그냥 나는 그 언니의 말투가, 너 쓸데없이 화장을 다 했니? 여기 너 봐줄 사람 누가 있다고? 별꼴이다.. 얘.. 이렇게 들렸다. 


물론 그 언니는, 어머 너 웬일로 화장을 했니. 이쁘다 얘... 였을 수도 있었겠지... 


나는 그 이후 내가 그 모임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그 이후 은근슬쩍 그 모임에서 빠지게 된 것 같다. 그 언니 이름은 지금 기억도 나질 않는다. 어떤 모임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무슨 공부 모임이었겠지. 어릴 땐 그런 걸 참 많이도 하고 다녔다. 그냥 그날 오랜만의 즐거웠던 기분이 순식간에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바뀌었던, 그 분위기만 어렴풋할 뿐이다. 




생각한 대로 말하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 가끔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한 마디 던지기 전에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고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누군가에 대해서 얘기할 때엔 좋은 얘기만 했으면 좋겠다. 싫은 얘기는 이렇게 혼자 일기장에 끄덕거리거나 하면서 풀어버리고. 


말이 조심스러워서 침묵을 선택했던 때가 있었다. 특히 외국인들을 만날 때 그러했던 거 같다. 나의 어설픈 외국어 솜씨로 그들에게 폐가 될까 걱정이 돼서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다만 최대한의 리액션을 보여줬다. 그러면 그들도 마음 편하게 속을 내비쳤다. 우리는 어쩌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가끔 독설적인 말 한마디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그것이 팩트이건 아니건 그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다. 상대방이 상처를 받았다면, 그걸로서 너는 잘못한 거다.


좋은 말만 해도 살아나가기 짧은 인생이다. 그냥 나는 좋은 말을 하고 싶다. 

너 오늘 참 예쁘다. 곱게 화장을 했네~ 오늘 날씨도 맑은데, 모임 끝나고 좋은 데 놀러 갔다 가렴!


작가의 이전글 크리스티안 짐머만 내한연주 관람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