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2장

분별

by yukkomi

바울은 본문에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분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영적 자녀이자 누군가의 영적 부모인 디모데에게, 무엇을 경계해야 하고 무엇을 품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친다. 바울은 거짓된 믿음은 경계하고, 연약한 믿음은 받아주라고 말한다.

연약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은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전혀 다르다.

그 차이는 양성종양과 악성종양의 차이와도 같다.

믿음이 적은 상태는 양성종양과 비슷하다.

몸 안에 이상은 있지만 생명의 주도권을 빼앗지는 않는다.

때로는 불편함과 통증을 주지만, 몸 전체의 흐름을 장악하지는 않는다.

죽음으로 몰고 가지도 않는다.

공동체의 관찰과 돌봄 속에서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은 흔들리지만 닫히지는 않는다.

질문하고, 도움을 구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다.

두려움이 있어도 관계를 끊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타인의 손길을 받아들일 여지를 남겨 둔다.

이 믿음은 작지만 살아 있고, 생명의 흐름 안에 머문다.

반면 거짓된 믿음은 악성종양과 같다.

겉으로는 확신 있어 보이고, 단단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확신은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보호와 자기 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단이 뿌려 놓은 거짓의 씨, 속이는 씨, 거역의 씨가 심긴 것이다.

악성종양이 자기 증식을 위해 주변 조직의 영양과 혈류를 빨아들이듯, 거짓된 믿음은 모든 해석과 관계를 자기 중심으로 끌어당긴다.

다른 목소리는 배제되고, 현란한 궤변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연약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공감하는 듯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오직 자기 믿음만 있다.

스스로 심판자가 된다.

악성종양이 몸 전체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 생존을 추구하듯, 거짓된 믿음은 공동체와 관계를 소모시키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 연약한 영혼들까지 함께 사망으로 몰고 가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예수님의 생명은 거짓믿음과 연약한 믿음에 다르게 반응한다.

믿음이 적은 자는 기다려 주시지만, 거짓된 믿음은 수술하신다.

거짓된 믿음은 설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받아줌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그대로 두면 생명의 흐름과 사랑의 흐름을 막아 버린다. 그러기에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

문제는 믿음의 크기가 아니다.

그 믿음이 생명을 향해 열려 있는가,

아니면 자신을 절대화하며 모든 것을 잠식하고 있는가이다.

어떤 그릇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릇 안에 무엇이 담겼는가이다.

나인가 예수님인가...


하나님의 생명은 거짓된 믿음은 제거하시고,

연약한 믿음은 영양을 공급하시며 받아 주심으로 자라게 하신다.

당시 에베소 공동체 안에도 악성종양 같은 거짓 교사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악성종양은 수술의 대상이고, 양성종양은 회복의 대상이다.

악성종양은 가라지처럼 빠르게 퍼지기에 바울은 주의하고 경계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주의하고 경계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터전은 굳게 서 있고 그 위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아신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악에서 떠나라.’
디모데후서 2:19

거짓된 믿음과 연약한 믿음을 분별하는 힘은

내가 애써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자라나는 예수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분별하려 애쓰기보다, 예수님과 하나 되어 자라는 데 집중하면 된다.

죄는 심판하시고, 사람은 회복시키는 것이 구원이다.

회복만이 아니라 심판 또한 구원이다.

그리고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심판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다.

나는 심판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

거짓된 믿음은 가르친다고, 싸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거짓된 믿음은 심판의 대상이며,

그 믿음에 붙들린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성이라는 악성종양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생명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후에도

내 안에 남아 있던 종양들—율법주의, 자기중심적 사고, 자기 의, 상처—이 빠져나가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잘 지내다가도 무엇인가 건드려지면

남아 있던 종양들이 다시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는 수술로, 때로는 돌봄으로

결국 회복으로 이끄셨고,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자유로워졌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나는 더 이상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내 안의 죄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심판받고 있다.

나의 건강을 위해, 진정한 자유를 위해 계속해서 심판받고 있다.

그때 나는 그저 기다리고, 바라며,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탄원할 뿐이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내가 할 일은 분명하다.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는 일.

생명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마치 세포들이 혈액을 주고받듯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서로의 약한 믿음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심판과 구원은 공의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상황을 아시고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으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것이 구원받은 자녀의 삶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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