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4장

경건에 대하여

by yukkomi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7-8)


성경에서 나온 용어들이 얼마나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는지, 또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없이 죄로 오염된 자아로 해석된 말씀이 얼마나 이상하게 변질되는지를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 있다.

본문에서 ‘망령되고 허탄한’과 ‘거룩’, ‘경건’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흥미로운 것은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허탄하고 망령된 교훈이 ‘음식을 금하고 결혼을 금하며, 거룩한 삶을 위해 자유를 제한하고 율법을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세상 속에서 수도승처럼 살아야 거룩해진다는 식의 생각을 ‘망령된 것’, 즉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이 복음을 경험하고 살아본 후에 쓴 목회 서신에서, 에베소 교회 내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것이라고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말한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십계명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고 한다.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지 말라는 뜻이라 생각된다.

율법주의와 경건주의에서 해석해서 가르친 하나님은 까다롭고 감정적이며, 벌을 좋아하는 분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이상하게 왜곡되었을까?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 두 가지를 나의 짧은 경험과 이해에 비추어 정리해 보았다.

1. 왜곡된 관계성

하나님과의 관계를 ‘종의 관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평생 종으로만 살아온 사람은 규칙이 편하다.

편안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는 그나마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규칙을 만들어 낸다.

관계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이것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저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하신다”는 식의 규칙을 세우고, 그것을 지켜냄으로써 불안을 달랜다.

그것을 통해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착각으로 자신을 끼워 맞추며, 단절된 관계에서 오는 공허함과 불안을 잊으려 한다.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변화하며 하나가 되어 가는 일은 많은 시간과 신뢰가 필요하지만, 규칙은 즉각적인 결과를 주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 왜곡된 관계성이 ‘경건의 모양’만 만들어 낸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자녀는 부모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안하다.

하지 않는다고 불안하지 않다.

부모는 순종을 말하지만, 그것은 관계의 조건이 아니라 자녀를 성장시키려는 부모의 의지다.

정상적인 자녀는 부모의 자유의지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유 속에서 아름답게 성장하는 존재다.

안정되고 건강한 양육 속에서 철없는 아이가 시간이 흐르며 부모의 모습을 닮아 간다.

부모를 점점 닮아 간다. 이렇게 점점 성장하는 삶이 경건이다.


2. 죄성의 습관 ― 스스로 거룩해지려는 인간

거룩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 생각된다.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아름다운 다스림이 경이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악과에서 나온다는 사단의 말에 속았을 것이다.

하나님처럼 지혜롭고 아름답고 싶었을 테니까...


이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욕구이기에, 죄로 더럽혀진 인간은 스스로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온갖 규칙을 만들어 낸다.

'충성, 순종, 거룩, 겸손'

이러한 아름다워 보이는 규칙들을 만들어 내며 경건을 흉내 내고, 스스로 거룩해지려 한다. 스스로 경건의 열매를 맺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힘이 다했을 때, 수많은 노력의 끝에 인간은 자신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맞닥뜨리는 공허함과 더러움은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결국 아름다움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신앙, 곧 아무도 살아나지 않는 신앙(딤후 3:5) 임이 드러난다.


반면, 예수님의 생명과 연합한 생명의 신앙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데 초점을 두지 않고 ‘생명나무를 먹는 것’에 초점을 둔다.

나의 죄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맛보는 것,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죄에 묶인 삶이 아니라 사랑에 붙들린 삶이 회복된다.

하나님을 왕이나 주인으로만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친자 관계가 되어 자유한 사랑 속에서 용납받고, 사랑받고, 이해받고, 격려받으며 경건은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자유하지만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난다. 물론 시간이 한참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인생의 수많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끝에 성장한 자녀는 아버지를 꼭 닮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그럴듯한 이론만이 아니라는 걸 경험했다. 죄로 망가졌던 한 사람이, 교회가 만들어 놓은 신약의 율법 속에 갇혀 죄책감으로 살던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공동체 속에서 보았다.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며 아름다워지려 했던 인간은 어떤 노력에도 더러워졌지만,

생명나무를 얻게 된 인간은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먹을 때 가능함을, 선악과를 먹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진정한 거룩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할 때만 가능함을,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에 꼭 붙어있으라는 이야기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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