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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사진관 Oct 14. 2018

공포의 요코하마행 열차

일요일의 게으름_ep13

여행 준비에 게으른 나지만, 여행 전 일주일은 유독 바빠진다. 못생긴 손톱이지만 평소에 하지 않던 네일아트도 해야 하고, 여행지에서 입을 옷도 생각해야 하고, 한동안 머리 손질을 못 할 테니 미용실도 다녀와야 하고, 화장품을 싸게 살 수 있는 면세 찬스도 놓칠 수 없으니 인터넷 면세점 적립금도 모아야 하고. 물론 본업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미리 일도 해 놓아야 하고. 이리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 시간이 있을 턱이 없다.      


2주간의 호주 여행을 준비함에 있어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여행 날짜에 임박해서 항공권을 구입하려니 경유 1회 정도는 옵션이 아닌 필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켓 값은 하늘을 찔렀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이왕 해야 하는 경유라면 어정쩡하게 공항에서 대기하느니 관광이나 즐기는 것이 나을 듯하여 일본 동경 9시간 경유 여정을 택했다. 그렇게 티켓을 구입하고, 게으른자답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채로 출국 날을 맞이했다. 그리고 여행 하루 전, 출발 시간을 확인하고자 e-티켓을 열어보니! 아뿔싸! 나니? 난데스까? 이게 웬일!!!!!!!!    


나의 여정은 “인천 – 나리타 – 시드니”가 아닌 "인천 – 나리타 – 하네다 – 시드니" 였던 것이다. 혹시나 티켓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몇 번을 다시 보고 또 본 후 그래도 믿을 수 없어 항공사에 전화를 해서 확인을 했다.    

  

“손님. 티켓에 나온 여정이 맞습니다. 나리타에서 내리셔서 하네다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정말 예상 밖의 여정이었다.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구심이 들기까지 했다.     


‘뭐 이런 여정이 다 있어. 젠장.’      


중국 항공의 저렴한 티켓도 있었지만, 나름 비싼 돈을 주고 호주에서 가장 큰 항공사를 택했는데 저렴한 티켓보다 여정이 엉망이라니. 솟구치는 배신감에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항공사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백번 천 번을 생각해 보아도 게으르고 꼼꼼하지 못해 여정을 미리 챙기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은 티켓팅을 하면서 여정의 비밀을 알게 되어 공항 체크인 데스크에서 언성을 높이는 몇몇 사람도 있었다는 점이다.      

‘거봐. 이 여정에 속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군.’     


어쨌든 나리타 공항에서 모든 짐을 찾아 하네다 공항까지 가야 했다. 합리화의 대마왕답게 나름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자면, 호주행 비행기 탑승 시 타국에서 환승하는 경우 환승 국 항공 규정에 따라 우리나라 면세점에서 구입한 액체류 화장품들이 아무리 꽁꽁 포장이 되어있다 하더라도 반입금지될 수 있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나리타 공항에서 찾은 캐리어에 화장품들을 다 넣고 하네다 공항에서 다시 붙일 수 있으니 면세품을 뺏길 걱정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리타 공항에서 캐리어를 찾아 과대 포장된 화장품을 억지로 구겨 넣고 신주쿠로 향했다. 딱히 유적지 같은 곳은 관심도 없고,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고 해서 동경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가서 사람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신주쿠행을 선택했다. 신주쿠로 가는 지하철 티켓을 사려는데 뜻밖의 시련이 다가왔다. 외계어로 난무하는 티켓 발매기. 나름 영어로 기본적인 소통은 된다고 자부했지만 한자와 일본어가 가득한 표지판 앞에서는 영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바보가 된 것처럼 자판기 앞에서 무기력하게 한참을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간당간당한 와이파이와 네이버 블로거님들의 도움으로 겨우 티켓을 구입 완료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주쿠 역에 도착해서 짐을 보관함에 맡기고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사실 화장품에 막 관심이 넘친다거나 패션에 관심이 넘치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명동 같은 느낌의 신주쿠는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배가 고파서 소바도 한 그릇 뚝딱하고, 와플도 사 먹고 커피도 한 잔 하며 여유를 즐겼다. 곧 나에게 닥칠 시련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이내 비행시간이 다가왔고 잽싸게 캐리어를 찾아 하네다행 열차에 올랐다. 나의 여행 동반자 구글 맵에게 물어보니 도쿄 모노레일을 타고 하네다 공항까지 갈 수 있다 하여 모노레일을 타는 코스를 택하고 표를 구입한 후 당당하게 지하철에 입성했다.      


잠깐 경유하는 거라 애초에 환전을 많이 하지 않기도 했고, 필요 없는 동전이 남아 있는 게 싫어서 남은 돈으로 300엔짜리 물과 과자를 구입했다. 룰루랄라 공항에 여유롭게 도착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과자를 먹고 있는 찰나....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환승역을 지나쳐 끊임없이 앞 만보며 달리는 열차.      


“저 하네다 공항 가는데요. 이거 하네다 공항 가는 것 맞나요?”

“어머. 아가씨. 이 열차는 요코하마까지 가는 급행열차예요.”

“엇. 그럼 저 다음 역에서 내려서 다시 되돌아가는 편이 나을까요?”

“잠시만요.”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주변의 일본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내 주변의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 일본어로 잠깐의 회의를 거친 후 나에게 요코하마까지 갈 것을 권했다.      


“비행시간이 몇 시죠?”

“지금 2시간 40분 정도 남았어요.”

“그럼 다시 되돌아가면 너무 늦을 것 같고요. 요코하마에 가면 하네다 공항까지 가는 직행 열차가 있어요. 그거 타시면 금방 도착할 수 있어요.”       


‘요코하마. 요코하마라.’     


어릴 적 공포소설에서 들었던 익숙한 지명이라 이름에서 풍기는 공포감이 나를 압도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판단하여 친절한 그들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내 비행기 시간은 10시였고 7시 30분 즈음 요코하마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순조롭게 하네다 공항 행 직행 열차로 갈아타려는 순간!     


“이 티켓으로는 직행열차를 타실 수 없습니다. 스미마셍.”     


이.럴.수.가. 하네다 직통열차를 타려면 새로운 표를 구입해야 했다. 하지만 물과 과자를 사고 남은 엔화는 300엔이었고 표를 구입하기 위해선 100엔이 더 필요했다. 신용카드로 구입하려 해 봤지만 일본 지하철 티켓은 신용카드로 구입이 불가능했다.      


“제가 하네다 공항에 가야 하는데요. 열차를 잘못 타서 여기까지 왔어요. 새로 표를 구입하고 싶지만 엔화가 약간 부족하고, 저 기계는 신용카드 이용이 안돼서 그런데요. 혹시 지금 가진 티켓으로 하네다행 직행열차를 탈 수는 없을까요?”

“저 쪽에 ATM 기기가 있어요. 거기서 현금을 인출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1분 1초가 아까운 시점이라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있는 힘껏 끌어당기고 또 한 손으로는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며 ATM기로 뛰어갔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시련이 다가왔다. 게으른 와중에 쓸데없이 철두철미했던 나는 외국에서 카드 분실을 우려해 현금서비스를 막아놓았던 것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어느새 8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역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지금 현금 서비스를 이용할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서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자 친절한 역무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알 수 없는 일본어의 향연 끝에 입을 뗐다.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처음 표를 샀던 신주쿠 역으로 돌아가서 원래 타려 했던 열차를 타시면 됩니다. 요래요래 가서 요래요래 갈아타면 되세요.”      

“응?? 그럼 저 비행기 놓치는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돈이 없잖아요.”     


자비 없는 일본 역무원은 냉정하게 “You have no money.”를 외쳤고, 물과 과자를 사느라 여윳돈을 다 써버린 죄, 열차를 잘못 탄 죄, 미리 교통편을 알아보지 않은 죄, 죄.죄.죄. 나의 잘못이 명명 백백 했지만 저 말을 듣는 순간 역무원이 나를 거지 취급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너무나도 상했다. 100엔 때문에 망신을 당하고, 캐리어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심지어 비행기를 놓칠 위기에 처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럽고 창피했다.         


시간은 이미 8시 15분을 향해 가고 있었고, 다음 열차까지는 약 7분이 남은 상황. 자비 없는 역무원은 계속해서 신주쿠로 돌아가서 내 표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을 타라는 비행기를 놓치는 옵션을 권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이를 악 물고 눈물을 머금은 채로 주변을 탐색했다. 그리고.......... 가장 착하게 생긴 일본 사람에게 다가갔다...      


“스미마셍, 100엔만 빌려 줄 수 있나요? 제가 사실은 공항에 가는 길인데.... (구구절절)”     


일본인은 당황한 듯했지만 불우한 외국인을 위해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100엔을 주었다. 나는 감사의 의미로 가지고 있던 한국 돈을 건네주었다.      


“This is present for you!! Thank you so much!”      


100엔이 이리도 소중한 돈이었다니! 나는 급히 표를 산 후 캐리어를 낑낑 끌며 겨우겨우 직행열차에 올라탔다. 다행히 밤 비행기여서 사람이 많지 않았고 10분 만에 검색대까지 통과할 수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깨끗이 씻어내고 비행기 자리에 앉자 그제야 안도감과 피곤함이 몰려왔다. 누구를 탓하리. 머리로는 내 잘못이라며 나의 대책 없음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탓하고 있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일본의 모든 것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흥. 나 같았으면 불쌍해서라도 그냥 눈감아 주고 열차에 타라고 했을 텐데. 아니면 그냥 100엔 줬겠다. 큰돈도 아니고 100엔인데. 너무해. 다 그 역무원 때문이야. 아니 그리고 왜 지하철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나보고 요코하마까지 가라고 한 거지? 그냥 바로 내려서 다시 신주쿠로 돌아갔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역시 일본은 진짜 나랑 안 맞아. 그리고 왜 항공사는 나리타에서 내려주고 하네다에서 환승하는 이상한 여정으로 스케줄을 짜 놓은 거지? 진짜 일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도움이 안 되는 나라야.’     


그랬다. 뭐라도 필요했다. 이 상황에 대한, 요코하마 역에서의 굴욕에 대한,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흘린 눈물에 대한, 내 여행의 시작을 얼룩지게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뭐라도 있어야 했다.      


“와인 드시겠어요?”      


그렇게 모든 것에 대한 원망으로 투덜대고 있을 때 즈음 호주 악센트를 구사하는 승무원이 웰컴 드링크를 건넸다. 달달하면서도 씁쓸한 레드 와인 한잔은 모든 원망과 피곤을 한 방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고단했던 일본에서의 아홉 시간을 뒤로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니 어느새 시드니였다.               

‘덕분에 잠은 푹 잤네.’      


고단했던 여정 덕분에 비행기에서 꿀잠을 청할 수 있었고, 장시간 비행의 피곤함 없이 시드니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원망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냉정한 역무원도, 나에게 요코하마까지 갈 것을 권한 일본인들도, 이상한 여정의 스케줄을 짜 놓은 항공사도 모두 자신들은 구하지도 않은, 구할 필요도 없는 용서를 받게 되었다.               


역시 여행지에서 불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눈물의 굴욕담도 그저 웃음 나는 추억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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