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렇게 믿고 싶어
걷다.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를 걷다.
지선이가 더블린으로 떠나는 날.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히터 위에서 고슬고슬 마른 티셔츠를 집어넣고 있다. 지선이는 새벽 6시 더블린으로, 난 오후 2시 보스턴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짐을 다 쌌는지 출발 시간보다 10분 일찍 나선다. 바깥은 추우니까 나오지 말고 더 자라고 한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문 앞에서 짧은 인사를 나눈다.
"조심히 가고, 한국에서 보자."
문을 닫고 침대에 털썩 눕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지선이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을까 바깥으로 나가본다. 셔틀버스에서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 이내 겉옷 하나 없이 반소매, 반바지 차림으로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는 물고기처럼 뻐끔 입을 벌리며 음소거 인사를 나눈다. 양손을 흔든다. 지선이는 뻑뻑한 창문을 열어 얼른 들어가라고 말한다. 차가워진 팔을 슥슥 비비며 호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에 바짝 붙어 지선이에게 다시 양팔을 크게 흔든다. 목구멍이 찌릿해진다. 잠시 후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가 점점 작아진다. 지선이와 함께한 장면들을 떠올리며 버스가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응시한다.
공용 화장실로 들어가 찬 물로 얼굴을 씻어낸다. 긴 복도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다.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있던 옷을 탁자에 올려둔다. 푸석한 방 공기에 얼굴에 묻은 물이 말라 금세 건조해진다. 모래가 잔뜩 낀 자동차 바퀴 소리가 창문 바깥으로 들려온다. 자동차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간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다들 어디론가 떠난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끝까지 올린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고요하다. 비좁은 방안에 넓고 옅은 공허함이 가득 에워싼다. 이 공허함이 싫어서, 혼자 남겨지는 일이 두려워서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공항으로 떠나 왔을 때가 생각난다. 혼자 남겨지기는 싫으면서 상대방을 혼자 남겨지게 했던 그 날이 생각난다.
떠나오고 떠나보낸다고 말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각자의 방향대로 향하고 있는 중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공허함이 덜어질까 믿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듣다.
정재형의 여름의 조각들을 듣다.
*자주 읽고, 가끔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