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장점과 단점, 하지만 <국가 부도의 날> 보다 나은 이유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월스트리트의 한 거대 금융회사. 어느 날 자신들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던 금융 상품에 거대한 위험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부실 증권들 여럿을 교묘히 묶어 판매해 온 그 상품은 그대로 방치하면 회사를 한순간에 끝장 낼 것이 자명합니다. 리스크 관리 팀의 한 말단 직원에 의해 우연히 그것이 발견된 시각은 밤 10시. 그리하여 그날 새벽 소집된 회장과 임원진 회의. 회장은 자신들의 부실 자산을 내일 장 시작과 함께 모두 팔 것을 명합니다. 사실 그 부실 금융 상품은 금융 상품 중 가장 수익성 높은 상품으로 그 회사 만이 아닌 월스트리트의 모든 금융회사가 취급하던 상품. 본인들이 한꺼번에 모든 상품을 털어버리면 시장이 순식간에 파탄날 것이라는 내부의 반대가 있지만 회장은 바위처럼 단호합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이 상품의 위험성을 인지할 것이고, 그것은 곧 모든 금융회사의 연쇄 부도로 이어질 것이니, 만약 누군가에 의해 시작될 대혼란이라면 그 시작은 우리여야 한다, 남들보다 먼저 부실 자산을 현금화하면 대혼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 지독히 이기적이고 냉혈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만 보면 가장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회장의 결정. 다음 날 아침, 장 시작과 함께 그들은 모든 부실 자산을 시장에 쏟아내며 시장 붕괴의 방아쇠를 당깁니다.
영화의 줄거리 자체에서도 드러나지만 영화의 기획 의도는 분명합니다. 돈만 좇는 금융 기업과 구성원들의 이기심. 그 의도는 노골적으로 영화 곳곳에서 대사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말단 직원이 서로 얼마를 벌었는지를 묻는 장면(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이 작년에 무슨 큰 일을 한 진 모르겠지만 2억 5천만 원을 벌었다고 이야기하며 그들의 팀장은 보너스를 제외하고 15억이 넘는 돈을 받았고, 회장은 100억이 넘는 돈을 벌었다 귀띔하는), 회사의 위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큰 규모의 정리 해고를 한 후 살아남은 직원들을 위로하긴커녕 축하한다며 박수를 청하는 팀장. 그는 잘린 이들은 패배자이고 남겨진 이들은 승리자이며 자리의 공백이 생긴 만큼 위로 올라갈 기회가 더 생겼으니 열심을 다할 것을 독려합니다. 극 중 한 인물은 과거 자신이 엔지니어로서 한 소도시에 다리를 놓은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300m밖에 안 되는 작은 다리였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역사회에 큰 도움을 줬는지, 그리고 자신이 금융 회사에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자신의 일이 지역사회에 어떤 이로움을 줬는지 모르겠다며 금융 회사의 피상성을 드러냅니다. 한 인물은 밖에 나가 땅에 삽질을 하는 게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금융 회사의 탐욕, 그 절정은 앞서 언급한 회장의 결정입니다. 금융 시스템이 파탄 나고 나라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순간에도 그의 결정에서 도덕적 판단은 거세되어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마치 현실과 이윤의 순수한 결정체와 같습니다.
이 영화가 견지하는 독특한 시각 중 하나는 금융 회사의 탐욕뿐 아니라 서민의 탐욕도 언급한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 위험 금융 자산의 대량 매각으로 해고가 자명해진 말단 직원이 팀장에게 말합니다. "저 같은 서민은 이제 힘들어지겠군요", 그러자 팀장 왈
사람들은 분수에 안 맞는 차와 집을 원하고 넌 그걸 도와주지. 그들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건 우리의 자비로운 손가락 덕분이야. 우리가 손을 떼면? 전 세계는 빠르게 공평해질 테지, 하지만 아무도 공평함 따위 바라지 않아. 돈이 생기기만 하면 좋아하지. 그러면서 순진한 척 돈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해. 난 그런 위선이 역겨워. 서민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대박 나세요!" 우리 모두 부자가 되길 원하지 않습니까. 부실 금융상품을 판매한 것은 금융 회사이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의 주체는 일반 시민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끊임없이 주변에서 듣습니다. "어디 뭐 좋은 종목 없어?" "상가에 투자해야지!" "걔가 이번에 주식으로 대박 났대" "부동산이 최고야" 시기하고, 질투하고, 재테크에 열을 올리며 항상 기회를 엿봅니다. 서민을 착취하는 집주인과 임대인을 비난하지만 정작 착취당하는 서민 역시 그들이 되지 못해 안달입니다. 재테크와 돈벌이에 적극적인 이가 아니라도, 먼발치에 떨어진 이 역시 부자가 되고 싶은 건 마찬가지. 그저 소극적이고 투자에 따른 위험 부담이 무서울 뿐, 탐욕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공연히 드러내고 누군가는 드러내지 않을 따름이죠. 눈 앞에 확실한 기회가 있다면 달려들지 않을 이는 없습니다. 우리 같은 개미 혹은 서민과 월스트리트의 뱅커 간의 차이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딱 하나 눈 앞의 확실한 기회를 아느냐 유무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정보와 자본력, 권력을 쥐어진다면, 과연 몇 명이나 입에 떠먹여 주는 그 엄청난 재물을 마다할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이긴 근본 원인.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탐욕을 시스템화하고 수치로 여겨졌던 세속적이고 물질적 욕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점입니다. 그로 인해 무서운 붉은 늑대 무리,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력을 무찔렀고 세상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풍요로워졌지만, 이 시스템은 '탐욕'이라는 태생적인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이 탐욕은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와 같아서 울타리의 문이 열리면 언제든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 들판을 헤집고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 야생마가 길들여지는 순간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건전한 자본주의의 성립 여부는 결국 야생마를 어떻게 "적당히" 길들일 것인가가 아닐까요.
다시 영화 내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의 내러티브 진행과 연출은 나쁘지 않습니다. 영화 끝까지 꽤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큰 결함이 있으니 바로 캐릭터 구축입니다. 극을 이끌어가는 중요 캐릭터 중 한 명인 케빈 스페이시(리스크 관리 부서 총괄)의 캐릭터가 모호하게 그려집니다. 그는 극 초반 부서 직원의 대부분을 자르는 대량 해고를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아픈 개만을 걱정하는 냉혈한으로 그려지지만, 극 중반을 넘어가며 '시장 파괴'와 '거래처와의 신의'를 이야기하며 시장 교란을 주문하는 회장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도덕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영화의 시나리오에서 캐릭터 변화character arc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문제는 언제나 계기와 동기에 있습니다. 냉혈한이 도덕적인 인물로 변화하는 과정에 계기와 동기가 결여되어 있기에 관객은 그의 캐릭터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문제적 캐릭터는 데미 무어. 그녀는 사이먼 베이커와 함께 영화의 초중반부터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그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그녀가 케빈 스페이시, 사이먼 베이커와 함께 회장의 주요 심복 3명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이 부실 금융 상품의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 회장에게 1년 전 분명히 전달했다는 점. 관객이 그녀에 대해 아는 바는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녀에게 특별히 정서적 애착이나 공감을 갖게 할 어떠한 장치도 결여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그녀를 특별히 악하게 그리는 것도, 특별히 억울하게 그리지도 않습니다. 그녀에게만큼은 관객의 감정이입을 자제하고 건조하게 관조하길 바라는 감독의 의도일까요? 하지만 영화 후반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영화 후반 회장은 이 사건의 희생양으로 데미 무어가 되기를 원합니다. 두둑한 보상을 약속하면서 말이죠. 영화는 밤을 새우고 동이 틀 때까지 창 밖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데미 무어를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담아냅니다. 자신이 버려졌다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 충격,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등 많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문제는 데미 무어의 캐릭터 구축이 부재하고, 그래서 관객과의 정서적 연결고리가 전무한 상태에서 인물의 고민을 꽤 긴 컷으로 보여줌으로써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죠.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처음에는 관객과 거리를 두던 캐릭터가 나중에는 가장 감정적인 캐릭터가 된다는 점은 영 받아들이기 힘든 지점입니다.
회장인 제레미 아이언스의 캐릭터 묘사는 극 초반에는 훌륭합니다. 등장부터 카리스마로 주변을 압도합니다. 아무도 반역하거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전지전능한 인물로 그려지죠. 하지만 케빈 스페이시를 설득함에 있어 실패한 그가 화장실 벽에 머리를 대는 장면은 회장 캐릭터의 톤 앤 매너를 깨뜨립니다. 등장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그 카리스마에도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던 걸까요. 하지만 감독은 그 한 쇼트를 제외하면 극을 통틀어 어디에서도 회장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 단 하나의 쇼트가 회장의 캐릭터를 희석시켜 버리고 말죠. 그냥 편집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두 말단 직원 중 한 명인 펜 바드글리는 비중에 비해 극에 기여하는 바가 극히 미미합니다. 그의 역할이라곤 직원들의 연봉을 까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없이 소모되고 말죠.
한 가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극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문제 중 하나는 이 영화의 편집입니다. 이 영화는 편집점이 튀는 부분들이 자주 목격되고 결정적으로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씬들이 너무 많습니다. 회장인 제레미 아이언스가 첫 등장해 독백하는 장면은 초반에는 강력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심각하게 긴장이 떨어집니다. 이런 부분은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납니다. 적어도 15분 정도는 편집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고 보는데, 이것이 단순히 편집자의 실수인지 아니면 비주얼에 대한 감독의 예술적 욕심 때문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케빈 스페이시가 전 부인으로 생각되는 인물의 집 앞에서 땅을 파는 씬이 있는데 카메라는 고정된 채 케빈 스페이시는 계속 땅을 파고, 전 부인이 현관에 나와 그에게 다가오는 장면까지 정확히 1분 3초. 의미 없는 이 쇼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하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불필요하게 버려지는 시간들이 씬의 곳곳에 담겨 극의 긴장감과 리듬감을 떨어뜨립니다.
<마진 콜>은 장점과 단점이 분명한 영화입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탐욕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물은 저마다의 이유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팀장은 순진한 척하지만 정작 자신들과 똑같이 탐욕스러운 서민을 경멸합니다. 금융 자산의 위험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인물, 이 회사와 금융에 환멸을 느끼는 스탠리 투치는 다시 돌아와 자리를 지키라는 회장의 말을 거역하지만 결국 해고 명목으로 2년간 회사로부터 받을 여러 혜택과 특별히 주어질 수당 시간당 176,471달러를 거부하지 못하고 회사로 돌아옵니다. 그에겐 얼마 전 브루클린에 새로 구입한 집에 딸린 모기지가 있었습니다. 회장으로부터 희생양으로 지목된 데미 무어는 거액의 돈을 거부하지 못하고 끝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회장은 어떤가. 부하 직원들에게 부실 자산을 모조리 팔도록 종용한 후 자신의 결정을 경멸하며 회장을 찾아간 케빈 스페이시에게 회장 제레미 아이언스는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놈들보다 선수 쳤다는 게 헛된 일이란 건가? 사실 이건 자네가 지난 40년간 매일같이 해온 일이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지. 1637년, 1797년, 1819년, 1837년, 1857년, 1884년, 1901년, 1907년, 1929년, 1937년, 1974년, 1987년엔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1992년, 1997년, 2000년도 마찬가지야.
계속 반복되는 거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자네나 내가 통제하거나 멈추거나 늦출 수 없어. 아주 조금도 바꿀 수 없어. 그저 우린 반응할 뿐이야. 제대로 하면 대박이고, 그렇지 않으면 망하는 거지. 세상에 승자와 패자의 비율은 언제나 똑같았어. 언제나 행복한 부자와 불행한 거지가 있어 왔지. 물론 세계 인구수가 늘긴 했지만 이 비율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고.
지난 수십 년 간 시장의 상승과 하락을 목격한 회장의 자본주의와 금융에 대한 철학과 믿음은 바위처럼 단단한 것이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부자와 빈자의 비율은 언제나 일정해왔다. 그렇다면 당신은 부자가 될 것인가 빈자가 될 것인가."
영화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만약 회장의 경험과 그에 따른 믿음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냐고 말이죠. <마진 콜>의 진짜 미덕은 사건과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비록 그 형식은 투박하지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며 이 점이 비슷한 사건을 다룬 <국가 부도의 날>과 <마진 콜> 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국가 부도의 날>은 어땠나요. 관객이 영화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나요? 생각의 여지, 해석의 여지가 있었나요? 한국의 다양한 경제, 사회, 정치 요소가 뒤얽힌 매우 복잡한 사건을 너무나 간단하고 쉽게 이분법으로 갈라치고 "너 나쁜 놈"이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저는 차라리 세상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쉽고 간단하고 분명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은 한 꺼풀만 벗겨내도 다양한 사안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국가 부도의 날>을 떠나서 최근 몇 년 동안 개봉된 대부분 한국 영화는 사건이나 현상의 복잡성 혹은 그 안에서 발버둥 치는 인물의 입체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간단히 흑과 백으로 나눠 훈계하기 바쁩니다. 정말 세상이 그 영화들처럼 쉽고 간단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세상은 그렇게 흑과 백으로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시나리오 구조, 캐릭터, 미장센 등 모든 것을 떠나서 <마진 콜>이 <국가 부도의 날>보다 훨씬 더 나은 영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