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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an 13. 2019

염력(2018)

염력의 가벼움, 그리고 <러덜리스>


https://youtu.be/KFw_YzRrYTw







하지만 이 영화의 이 참을 수 없는 엉성함과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난 연성호 감독의 진심과 선의가 느껴졌다. 단순히 상업적 성공만을 위해서 용산참사 사건을 소비하거나 희화화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라면, 그것 때문에 삶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면, 하지만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염력>은 누구나 한번 상상할만한 소재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곳곳에 코미디적인 요소를 넣은 이유는 항상 비극을 무겁고 우울하게만 다루는 한국 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느꼈다. 문제는 실행이 너무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 착잡했다. 전형성을 탈피해보고자 노력했던 <염력>의 잘못된 연출은 오히려 뒤이어 나올 영화의 운신을 폭을 좁혀버린 악수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염력>은 사람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고 힘없이 사라졌다. 그 비난의 대부분은 영화 내적 완성도가 아니라 '도덕적 잣대'에 기인했다. <염력>은 비극을 우울하게만 접근하는 한국 영화의 전형성을 더 강화시키는 반발효과만 가져왔다.

어지러운 마음 속에서 영화 <러덜리스(Rudderless)>가 떠올랐다.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 많은 학생들의 죽음, 가해자의 자살, 그리고 남겨진 가해자의 가족. 우린 비극적인 사건을 조명함에 있어 언제나 관심의 중심에 피해자를 놓지 가해자를 놓진 않는다. 그들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악인이 아닌가. 처벌 당하고 멸시 당해 마땅한 이들을 왜 고려한단 말인가.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의 가해자, 그의 가족, 그의 지인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그들은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 걸까. 단 한 순간의 즐거움도 용납되지 않는 죄인의 심정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낙인을 찍는 것은 당연한걸까. <러덜리스>에서 끔찍한 사건 이후 가족이 해체되고 아버지는 낯선 작은 마을의 작은 보트 안에서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근사한 회사의 중역이었던 그는 이제 공사장에서 일을 한다. 아버지는 우연히 아들이 쓴 노래를 발견한다. 그 노래를 불러보는 아버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 아버지의 노래에 이끌려 그를 찾아온 젊은 뮤지션. 그 뮤지션의 계속된 설득에 결성된 밴드.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가 만든 곡,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 그 밴드는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오랫동안 정체를 숨기고 일상의 감정을 억누른 채 침묵 속에서 살았던 아버지는 삶의 즐거움을 조심스레 꺼내려 한다. 하지만 이내 밝혀지고 마는 아버지의 정체.

영화 <러덜리스>는 이 아버지의 삶을 가볍지 않게, 하지만 무겁지도 않게, 대성통곡이나 괴성, 고함 한번없이 덤덤히 그려간다. 노래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는 이야기. 사건 앞에서 사람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낙인 찍고 동정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닌, 계속 이어가야 할 삶을 가진 소중한 한 인간으로서 따뜻하게 다가가는 이야기.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못할 사람들, 바로 가해자의 가족을 보여줌으로써 차분히 삶에 대해, 용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비극을 다룸에 있어 담담함을 견지한 영화가 한국에 단 한편이라도 있었을까. 울부짖고 소리 지르며 과잉된 감정을 쏟아내지만 정작 자극적으로 사건과 피해자를 묘사하면서 슬픔과 동정을 강요한다. 오직 흑과 백, 피해자와 가해자, 동정과 비난만 난무하는그 세계에 회색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 몇 년은 한국 영화를 보면서 불편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극장에서 나가버리고 싶은 그 불편함들은 진실을 마주할 때의 전복적이지만 건강한 자각의 불편함이 아닌 오직 단순하고 극단적인 서사와 자극적인 묘사 방식 때문이다. 스릴러나 액션이 아닌 코미디나 드라마에서 조차 말이다.

죄에 대한 응당한 처벌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 하지만 죄나 죄인에서 벗어나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보는 것. 전형성이나 선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피해자도, 가해자도, 그를 둘러싼 이들도, 결국은 누군가의 벗이고, 가족이고, 무엇보다 모두 개별적으로 소중한 존재이다. 우린 너무나 현상과 사람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타인을 대상화하고, 객체로 보는데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슬픔도, 즐거움도, 희극도, 비극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데 익숙해진 건 아닐까.

<염력>과 <러덜리스> 속 소재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염력>의 그 모든 엉성함을 차치하고, 조금만 더 오도방정 떨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고, 정서를 강요하지 않고, 조금만 더 차분히, 조금만 더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봤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염력> 관람 후 맛 본 쓰디쓴 뒷맛은 감독의 선의,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의 오해, 극단적이고 섣부른 평가, 엉성한 서사, 무엇보다 예술을 예술 그대로가 아닌 당위나 가치로 재단하고 가두려는 사회 분위기에 대해 커지는 회의감, 뭐 그런 것들이 뒤섞인 알 수 없는 씁쓰름함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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