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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an 14. 2019

특수부대 전랑 2

만약 내가 중국인이었다면


1억 5678만 명의 관객. 854,248,869달러 수익.




<전랑 2>를 보고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가 떠올랐다. 쿠르베 자신이 행하진 않았지만 그가 개척한 사실주의 화풍은 훗날 사회주의의 선전 도구로 전락했다. <전랑 2>는 아프리카를 발판 삼아 세계의 패권을 쥐려는 중국의 야욕과 국가주의, 그 도구로써의 '인민해방군'을 정당화하는 '선전'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영화는 국가주의와 패권 야욕을 은유나 비유를 통해 애써 애두르거나 숨기지 않는다. 그 직설적인 의도만큼 서사도, 플롯도, 씬들도 직설적이다. 이런 노골성은 도광양회 시대는 끝났다 일갈한 시진핑의 직설 화법의 재연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한번 생각해봤다.




이 모든 비판의식은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내가 중국인이라면 이 영화를 어떤 식으로 봤을까.




내가 중국인이어도 단순하고 투박한 영화 문법은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 촌스러움과 진부함에 '아직 중국 영화는 할리웃에 비하면 멀었다'고 느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몸 전체로 번져가는 뜨거움. 그 국뽕 기운은 마치 마약처럼 날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었을 것 같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국민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던 국가가 이젠 미국을 넘보는 국가가 됐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구석구석에 산업기반을 세우고 서양 열강과 대립각을 세운다.




위의 장면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가. 허울 뿐인 UN을 무시하는 악의 세력. 그 악의 세력은 공공연히 백인으로 묘사된다. 최신예 이지스함과 전투기가 등장해 시원하게 악당을 쳐부순다. 우리를 지배하고 무시하던 백인을 시원하게 쳐부수는 이 영화를 보며 중국인인 나는 짜릿한 카타르시스에 전율할 것이다. 만약 똑같은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면. 모든 것이 똑같고 주체만 한국이었다면.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한국군이 앞장서 전세계의 산업기반을 장악해가고 최첨단 무기로 백인들을 깨부순다면. 우리들이 미국과 대등한 존재로서 전세계의 질서를 새로 쓴다면. 손흥민의 한 골에도 열광하는 우리 아닌가. 어떤 반응일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국뽕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정확히 후벼 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영화를 1억 5천만이 넘는 중국인이 본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더군다가 영화를 많이 접하지 않는 관객에게는 투박하고 촌스럽고 진부한 플롯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헐리웃 영화와 대등한 멋진 액션 영화로 보일 것이다. 플롯의 진부함을 차치하고, 많은 예산을 쏟은 이 영화는 실제로 볼거리 하나는 쏠쏠하기도 하다. 보는 내내 나의 조국 중국의 사랑이 강물처럼 샘솟고, 전세계에서 중국의 이권을 위해 싸우는 인민해방군을 자유와 정의의 수호신으로서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작렬하는 액션과 스펙타클에 열광하면서 때때로 웅장한 현악을 배경으로 화면 가득 슬로우 모션에 걸려 느리게 펄럭이는 오성홍기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중국이 이렇게 대단하구나. 중국인이 내가 너무 자랑스럽다" 그렇게 중국의 위대함과 정의의 존재를 무의식 중에 재확인하고 내면화 할 것이다. 지난 수 십년 간 미국의 영화들이 그래오던 것처럼.


선동

그것이 바로 선동의 속성이다. 타인의 시선에선 말도 안 되고 비이성적이고 위험하지만 특정 집단에게는 깊은 의미와 가치를 갖고 '우리'를 명확히 정의내리는 것. '우리'를 타 집단과 구분 지음으로써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 '정의'를 정의하는 것. 일본이, 이탈리아가, 나치가 그랬고 미국도,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은 자유로운가. 물론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런 할리웃과 중국식 액션 장르 대신 시대물에서 <전랑 2>가 판친다. 우리에겐 그들만큼의 이런 거대 액션을 만들 자본과 시장이 없다. 그럴 배짱도 없다. 그럴 수 없는 우리는 미래를 보기 보다는 과거를 돌아본다. 지나간 사건들을 되새기며 도덕적이고 평면적인 시선으로 정의에 대한 편협한 도그마를 세운다. 눈물과 악다구니로 점철된 감정 과잉을 앞세워 그 도그마를 미화하고 가치로서 강요한다. 그 도그마에 의문을 제기하는 누구라도 엄청난 악플과 사회적 비난에 시달린다. 과연 우리가 중국가 다른가.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예술은 무의식과 본능, 감성의 발현이다. 이성이나 논리가 방어할 틈도 없이 가슴에 직접 꽂힌다. 무의식의 존재인 인간에게 감성과 본능이란 언제나 이성에 앞서기 마련이다. 한번 뜨겁게 달궈진 가슴은 이성을 지배해 논리를 재구성시킨다. 그렇게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논리는 뜨겁게 달궈진 가슴이 정당하다고 변호한다. 그래서 정치사회적 목적을 지닐 때 예술은 교묘하지만 더 파괴적인 무기로서 대중에게 작용한다. 이미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으므로 논리가 끼어들 수 없다. 역사적으로 선동의 최전선에는 언제나 예술이 있었다. 피를 끓게 하는 감동과 아름다움 이면에는 항상 목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술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그에 대한 수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적어도 내게 예술의 역할은 순수한 예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사상, 이론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고, 억압받는 본능을 표출시키고, 모순과 부조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파격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가치와 믿음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하는 것, 어느 하나의 시선이나 가치를 정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떨어져 사건을 바라보고 입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만드는 것, 그래서 도그마를 견제하고 해체시키는 것.


언제나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여진다. 교묘하게, 정의라는 빛나는 이름으로. 전체주의는 어디 지구 반대편에 멀리 있거나 과거에 사라진 공룡같은 존재가 아니다. 유령처럼 지금도 떠돌고 있다. 한 사회에서 하나의 특정한 시선만이 강요되고 존재한다면 그것이정치 사회적체주의이다.


그래서 <전랑 2>는 돈만 많이 쓴 유치한 쓰레기 영화로 치부하며 가볍게 비웃고 넘어가기엔 '위험한' 영화이다.


PS.
내겐 <공작>, <국가 부도의 날>, <마약왕>, <PMC> 등 일련의 한국 영화들이 사건의 입체성을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특정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전랑2>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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