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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an 22. 2019

스윙 키즈

초반의 용기는 어디 간 걸까.


안타까웠습니다.

한국 영화에 참 세게도 들러붙은 귀신을 결국 떨쳐버린 영화가 하나 등장했나 싶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생각의 가닥을 잡으려 하는데, 잘 잡히지가 않습니다. 불균질했던 영화의 결만큼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들도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굉장히 영화적인 영화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영화 초중반까지 이어집니다.


'영화적인 영화'라는 말은 현실적이지만은 않다는 말과 동일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속 스윙 밴드의 모습은 2018년의 인물들 같고, 강병삼과 샤오팡은 통역 없이 각각 한국어와 중국어를 함에도 말이 통합니다. 표정과 동작은 과장되어 있고, 독특한 샤오팡 캐릭터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주성치 영화 속의 어느 한 캐릭터를 연상시킵니다. 희한한 표정으로 희한한 춤을 추며 싸이처럼 등장하는 샤오팡은 초반부터 초중반까지 이 영화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합니다. 양판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중국어, 일어를 합니다.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길래 파고다학원도 없던 그 시절 그런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함구합니다. 그냥 4가지 언어를 하는 캐릭터다 하고 설정을 하고 들어갑니다. 미군들과의 주먹다짐은 댄스 배틀로 이어집니다. 그것도 한국전쟁 후 부활한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1980년대 가수 정수라의 노래를 배경으로. 이러한 요소들, 현실적이지 않은 '판타지적 설정과 캐릭터'가 <스윙 키즈>의 비현실적인 톤 앤 매너를 구축합니다.





한국 관객에겐 조금 독특한 면이 있는 듯합니다. 외국 영화와 한국 영화에게 이중잣대를 들이미는 경향이 조금 있다는 것이죠. 외국 영화를 볼 때는 설정이 과하거나, 판타지적 요소가 있어도 '영화니까'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한국 영화에게는 '사실성', '현실성', '개연성'을 가혹하게 들이미는 경향이 좀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한국 관객이 아닌 한국 영화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 영화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영화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사랑, 조폭, 경찰, 검사, 살인, 범죄, 정치, 드라마. 전 세계 영화시장규모 5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한국 영화 시장에서 한국 영화는 유독 저 소재들에 집착하며 '현실성'을 추구해 왔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관 속에서 인물들이 울고 불고 악다구니 쓰고 죽이고 피 튀는 영화들이 대부분입니다. 항상 보던 게 그런 것이었으니 금발의 파란 눈이 아닌 한국 영화에서 판타지적 설정을 보는 것이란 영 낯선 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웰컴 투 동막골>은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관에서 펼쳐진 이야기였지만 영화 중간 뜬금없이 판타지적 묘사가 나타나죠. 산속에서 멧돼지에게 쫓고 쫓기는 장면이 만화적으로 그려지고, 곳간에서 터진 수류탄에 옥수수가 공중에서 팝콘처럼 튀겨지며 눈처럼 묘사되는 장면은 지극히 '영화적' 순간이었습니다. 관객들은 그 일련의 시퀀스를 '이건 말도 안 된다'며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한국 영화 역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씬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 관객들은 리얼리즘에서 조금 벗어난 한국 영화를 용납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일차적으로는 현실과 판타지 간 줄타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어설픈 영화들에 문제가 있지만 영화적 설정에 있어서 한국 관객은 자국의 영화에게만큼은 유독 가혹한 면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구구절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스윙 키즈>를 향한 비난이 대부분 '이게 말이 돼?' '이게 대체 뭐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스윙 키즈>는 <웰컴 투 동막골> 속 그 추억의 시퀀스의 연장선으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판타지에 각각 한 발씩 담그고 있는 영화로 말이죠. 이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싫든 좋든 이 영화의 '판타지적 설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게 납득이 안 되면 아마도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초반의 당혹스러움을 조금 거친 후 곧 설정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리고 100억이 넘게 들어간 거대 영화에서 이런 설정을 차용했다는 점이 실로 용감하다고 느꼈습니다. 감독과 제작사의 용기란 제작비와 반비례하기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한국 관객이 이런 낯선 설정을 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것은 누구보다 제작에 참여한 이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큰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런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은 박수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스윙 키즈>의 판타지적 세계관은 극초반의 어색함을 지나면 리듬감 있는 화면, 감각적인 미장센과 화면 전환, 유쾌한 분위기, 과장된 표정과 몸짓 등 연출과 화합하며 묘하게 매력 있는 세계를 그리는 듯 보였습니다. 초중반까지는 말이죠.


책 <Notes on Directing>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Elements of style are best applied with intention, purpose, and meaning -- not as ends in themselves.


무슨 말인고하니, 영화에 있어 스타일을 결정짓는 것은 의도와 목적, 의미이지 그 미장센 자체가 되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이쁘니깐'이란 단순한 생각으로 스타일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이죠.


<스윙 댄스>가 초반의 굉장히 영화스러운 미장센을 보여줬던 데에는 분명히 감독의 이유와 의도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이 영화는 초중반이 지나면 영화의 톤을 완전히 바꿉니다. 그 상상력과 설정, 감각적 미장센과 화면 전환은 자취를 감추고 급작스럽게 현실적인 영화로 태세 전환을 합니다. 마치 영화 초반과 중반 다른 감독이 연출한 것처럼 말이죠. 연출의 스타일 자체가 이렇게 완전히 변해버리는 불균질성은 다른 영화에서는 거의 못 봤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스윙 댄스>의 가장 큰 패착은 여기에 있습니다.


초중반 이후부터 이 영화는 탭댄스와 스윙보다는 이데올로기와 시대상을 그립니다. 빨갱이냐 아니냐로 나뉘던 사회. 누군가가 빨갱이다라고 소리치면 따져볼 것도 없이 돌팔매질부터 날아가던 비극의 시대. 그러면서 초중반까지 한껏 들떴던 영화 분위기는 무겁게 침잠해 들어갑니다.





스타일의 충돌이 낳은 키메라

한국 영화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한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지 않고 네다섯 마리를 잡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요것도, 그것도, 다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우왕좌왕하면서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끝나곤 하죠.


토끼 한 마리를 잘 따라가는 듯 보였던 <스윙 댄스>도 결국 여러 마리를 잡으려다 모두 놓칩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포로가 나뉘어 서로의 목숨까지 빼앗던 거제 포로수용소의 모습, 전쟁 중 가족을 잃은 사람들, 빨갱이다라는 외침 한 번이면 돌팔매질이 날아오는 당시 사회의 모습, 선동자의 외침 한 번이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 등등 거제 포로수용소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시대상을 시시콜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의도가 파악되었습니다. 탭댄스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결국 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구나. 결국 <스윙 키즈>는 지금까지 수없이 봐왔던 한국 영화의 또 다른 재탕이 되고 말았습니다. 앞서 이 영화의 결정적 패착이 연출의 불균질성(일관성 결여)이라고 했던 이유입니다. 초반의 판타지적 분위기가 음울한 중반 이후 분위기와 충돌하면서 이 영화는 괴기스러운 이종의 모습을 한 키메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반 이후 현실적 시대상을 그리더라도 초반의 연출 스타일을 끝까지 이어갔으면 '신선한 시도' 때문에라도 많은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칭찬을 받았을 겁니다. 아니면 일반적인 한국 영화처럼 아예 처음부터 현실적이고 우울한 톤으로 시작했다면 적어도 '거제도 포로수용소'라는 신선한 소재 때문에라도 조금 더 나은 평을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스타일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최악의 수를 둔 것입니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참 의문입니다. 몇 가지 시나리오가 예상되기는 하지만...





메시지를 위해 봉사하는 인물들

앞서 말한 한국 영화의 특징 중 또 다른 하나. 그것은 이야기보다 메시지 전달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 전달을 위해 캐릭터를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영화는 뭐를 전달해야 한다는 확고한 기획 의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 의도만 있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와 캐릭터가 빠져있는 상황. 등장인물들이 어떤 사람인지 구축하지 않고, 인물 관계를 구축하지 않고, 인물의 갈등을 보여주지 않고, 인물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영화란 결국 이야기이고, 이야기에서는 위의 나열이 전부인데 그냥 다짜고짜 메시지를 들이밀면서 캐릭터를 소비시킵니다. 게다가 관객을 바보로 아는 경향이 있어서 은유와 비유, 다층적인 이야기는 지양합니다. "관객이 오해하지 않게, 메시지의 왜곡 없이, 최대한 명확하게" 친절하게 영화를 만들어줍니다. 그러니 한국 영화에서 입체적 캐릭터와 다층적 이야기가 나올 리 없습니다. 처음부터 메시지만 담겨 있는 선전 영상, 혹은 광고처럼 단순합니다.


<스윙 키즈>는 캐릭터를 소홀히 다루는 한국 영화의 특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러닝 타임이 두 시간이나 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제외한 인물에 대해 우린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강병삼의 부인이 마을에서 돌팔매질을 당한 그녀였다는 것이 제대로 묘사되지도 않고 대충 넘어가버립니다. 그가 댄스팀에 들어간 이유이자 영화 내내 대사의 90%를 차지한 내용이 그 부인 이건만 극적이어야 할 그녀와의 만남은 그저 증발해버립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어벙함으로만 일관하는 샤오팡도 아쉽습니다. 그에 대한 뒷 이야기가 더 있었다면, 그를 통해서 거제 수용소 속 중국인의 모습은 어땠는지 조금이라도 보여줬다면, 우린 귀여운 샤오팡에게 더 애착이 갔을 것입니다. 양판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에 대한 사연이 더 있었다면. 우린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큰 역할을 하는 설정인 세 가지 언어는 어떻게 익히게 됐는지, 부모님은 어떻게 됐는지 등 그녀에 대해 좀 더 알았다면 그녀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아무 소용없다"는 말이나 어려운 삶이 조금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와 로기수의 관계 구축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영화 후반 로기수와의 키스가 그렇게 건조하고 무의미하게 소비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대부분 캐릭터의 대사와 행동이 가벼운 이유는 애초에 그들의 캐릭터가 구축되지 않아서입니다. 관객과 그들이 철저히 유리되어 있으니 그들이 무엇을 하든 관객에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으니 그 행동과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고, 그러니 가볍게 느껴질 뿐입니다.


주인공 로기수에 대한 묘사는 더욱 아쉽습니다. 로기수는 이 영화가 그 기나긴 러닝 타임 중 대부분을 할애한 인물입니다. 북한 포로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던 한 인물이 탭댄스를 추게 된다는 설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매력적입니다. 로기수라는 인물은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압축해놓은 상징적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이미 영화 시작부터 대부분 예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가 탭댄스를 추는 사실이 그를 영응으로 따르는 북한 포로들에게 들통이 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로기수는 탭댄스를 출 것이라고.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플롯의 진정한 미덕이란 <식스 센스>,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관객의 예상을 피하는 것보다 그 예상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플롯의 미덕이 관객의 예상을 전복시키는 것이라면 온통 영화는 관객을 기만하려는 영화, 줄거리와 상관없는 결론의 영화로 넘쳐날 것입니다. 색다른 '반전'보다 더 짜릿지만 더 어려운 작업은 관객의 예상대로 흘러가지만 결국 큰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뻔한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는 결국 탄탄한 내러티브와 연출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스윙 키즈>의 핵심. 그러니까 이 영화를 삼각 플라스크에 쏟아 넣고 계속 끓이고 끓이고 끓여서 결국 남게 되는 결정체는 로기수라는 인물이 북한군의 영웅에서 미제 춤을 추는 탭댄서로 어떻게 거듭날 것인가 하는 캐릭터 변화character arc에 있습니다. 그 캐릭터 변화에는 크게 두 개의 변곡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북한군의 영웅인 자신이 탭댄스를 추고 싶어 하는 자연인으로서의 로기수를 어떤 과정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가, 나머지 하나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북한군 포로에게 자신이 미군과 남한군 포로와 함께 미제의 댄스인 탭댄스를 춘다는 사실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 아니면 밝혀질 것인가입니다.


이 두 개의 변곡점과 그를 둘러싼 갈등이 주인공인 로기수의 행동을 이끄는 동기이자 극의 긴장을 조성하는 포인트이자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로기수는 큰 딜레마를 안고 있는 인물입니다. 딜레마를 안고 있는 캐릭터는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로기수는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긴 시간을 로기수의 고민에 할애하고 정작 로기수가 북한군 포로들 앞에서 자신이 탭댄스를 춘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순간, 영화를 통틀어 최고조에 오른 긴장이 폭발하는 그 결정적 순간 컷을 해버리고, 멍든 눈의 로기수를 다음 컷으로 보여줍니다. 이야기의 핵심, 지금까지 그토록 애지중지 쌓아오던 정서와 긴장, 갈등은 그 무심한 컷과 함께 맥없이 날아가버립니다. 이건 마치 영화 <시스터 액터>에서 우피 골드버그의 정체를 동료 수녀들이 알게 되기 직전 컷,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원빈이 정신 나간 장동건을 보려는 순간 컷 되는 것과 다름없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연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연출은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초반에 이야기한 연출 스타일의 불균질함은 어찌어찌 여러 시나리오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건 참 납득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캐릭터를 소홀히 다루는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미군 병사, 바보 역할을 하면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삼식, 로기수를 따라다니는 꼬마, 영화 후반 뒤늦게 등장하는 로기진 등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제외하고 그나마 매력 있고 극을 추동시키는데 힘을 보탠 인물은 외팔과 외다리의 '광국' 하나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마저도 얼마 후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맙니다. 존재만으로 극에 엄청난 긴장을 부여하던 그를 왜 그렇게 일찍 죽여버린 것인지 이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허망한 죽음과 함께 그가 등장했던 모든 부분은 전부 드러내도 상관없는 무의미한 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등장과 함께 전환됐던 분위기가 그의 죽음과 함께 원점으로 돌아가버리니까요.


영화 <업>과 <서치>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캐릭터 구축입니다. 두 영화 모두 초반 주인공의 배우자가 죽습니다. 그것도 영화 시작 후 약 5~10분 만에. 매우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 속 주인공의 배우자가 죽는 씬은 정말 슬픕니다. 영화는 모두 영화에서 캐릭터 구축에는 단 5분으로도 충분하다는 점, 그리고 효과적으로 캐릭터쓰인 시간의 밀도는 굉장히 높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재미있는 영화는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가 살아있습니다. 쓸데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캐릭터, 버려지는 캐릭터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갈등을 조성하고 해결하는데 이바지하며 이야기를 추동시킵니다. 재미있는 영화는 쇼트 한 컷, 대사 한 줄 버려지는 법이 없습니다. 당겨지는 줌 한 번, 흘러나오는 스코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음향, 돌아가는 카메라의 패닝이나 인물을 따라가는 트래킹까지 모든 요소가 캐릭터 구축과 극 진행에 쓰입니다. 그렇게 쓰인 러닝 타임은 밀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높은 밀도의 시간은 관객의 주의와 정서를 빨아들입니다. <업>과 <서치>는 영화가 시작하고 채 5~10분 만에 주인공의 부인이 죽지만 관객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하지만 <스윙 키즈> 속 영화 내내 부인을 애타게 찾는 강병삼에겐 좀처럼 정서가 이입이 되지 않습니다. 로기수와 양판래의 키스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의 이유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은 결국 이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영화가 끝까지 판타지적이고 희화적인 설정과 세계관을 끝까지 유지했다면, 그래서 기존 한국 영화의 틀을 탈피했다면 적어도 "아니 이게 뭐야?" 식의 황당해하는 관객 반응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초반의 낯선 판타지적 설정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킨 꼴이 됐고,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남과 북의 병사가 한 팀으로 탭댄스를 춘다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주제는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위해 소비되는 하나의 '아이템'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스윙 키즈>는 무척이나 신선한 소재를 발굴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최정점에 있던 시기, 이데올로기라면 목숨까지도 바꿀 수 있던 그 시대, 밀집된 한 공간에 뒤엉켜있던 서로 다른 믿음의 포로들, 그 안에서 한국무용도 아닌 탭댄스를 추는 남과 북의 포로들.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들의 주변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무궁무진해 보입니다. 조금 더 캐릭터에 집중했다면. 캐릭터를 통해서 시대를 말했다면. 그 비극적인 시대와 공간 속에서도 절망보다는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했다면. 생각할수록 참 아쉬움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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