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물 한 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요즘 수많은 영화에서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본 스토리와 플롯, 캐릭터, 씬 구성까지. 익숙한 배경과 갈등, 해결, 캐릭터. 도식적이고 계획적으로 흘러가는 내러티브. 그 안에서 그저 작가가 짜 놓은 장기판 위의 말처럼 느껴지는 생명력 결핍의 캐릭터들.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서 많이 본 장면'으로 만들어진 영화들.
이런 영화들의 특징은 딱히 흠잡을 구석 없이 매끈하지만 뭐 하나 남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딱히 예술가적 야심, 감독의 고집이나 욕심 없이 북미 티켓 박스에서 매출 적당히 나오고 중국 시장에서 커버해주고 2차 시장으로 넘어가 수익 좀 나면 되는 '손해만 많이 안 나면 되는 영화'. 예술이나 작품보다는 '제품', '공산품'으로 느껴지는 영화들. 요즘은 콘텐츠의 질보다는 양으로 우선 고객을 가둬두려는 넷플릭스의 방침 때문에 콘텐츠들이 우후죽순 제작되면서 이런 '공산품 영화'가 부쩍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다른 회사들 때문에 이런 흐름은 더 악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튼 <범블비>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익숙한 캐릭터, 익숙한 장면, 익숙한 갈등과 해결. 익숙한 결말. 범블비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기본 이야기 짜임을 대충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루저와 너드의 짝사랑. 고난을 통해 맺어지는 결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처 때문에 주인공이 시도하지 못하는 한 가지 행동. 하지만 영화의 절정, 결정적 순간에 굳은 결심으로 용감히 감행되며 상황을 반전시키는 그 행동.
정체불명의 존재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부, 그리고 뒤늦게 그 존재가 친구였음을 깨닫는 그들.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조금은 바보스러운 정체불명의 존재.
주인공과 정체불명의 존재 사이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우정, 하지만 세상(혹은 정부)에 드러나는 그 존재의 정체, 겪게 되는 고난, 그리고 슬픈 이별.
수없이 많은 영화들에서 반복됐던 이야기 공식입니다. 그중에서도 <범블비>는 <아이언 자이언트>와 <E.T.>의 이야기 구조와 아예 똑같습니다. 어떠한 플롯의 변주나 새로운 시도 없는 이 영화의 용기가 대담하다고까지 느껴졌습니다. 굳이 하나 다른 점을 뽑자면 외계에서 온 친구 캐릭터인 범블비를 다른 영화의 캐릭터들보다 더 애완견스럽게 연약하고 귀여운 존재로 묘사했다는 점 정도?
이때 정도면 주인공과 범블비가 만나겠구나, 한 어느 정도 시간 동안 우정을 쌓을 테고, 지금 정도면 주인공 친구 캐릭터가 나타나서 범블비 정체가 탄로 날 테고, 이제 슬슬 고난이 시작될 테고, 저 다이빙, 저건 과거랑 오버랩되면서 못 하는 거 보니깐 결국 나중에 용기 내서 할 장치가 될 테고. 이런 식으로 <범블비>는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예상들에서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진행됐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7~90년대 복고적 문화 아이콘(특히 팝 음악)의 차용은 차용을 넘어 아예 그 시대를 영화의 배경으로 끌어들이면서 전면적으로 펼쳐졌습니다. 이러한 복고로의 회귀는 패션에서도 함께 진행됐죠. <그것 It>이나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영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복고 트렌드의 최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추억의 올드 팝이 뜬금없이 플레이될 때의 그 신선한 충격이란! <트랜스포머 1>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주인공(샤이아 라포프)이 꿈에 그리던 그녀(메건 폭스)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차가 퍼지자 그녀는 그냥 걸어간다 하며 차에서 멀어지죠. "Come on, come on, come on!" 하며 샤이아 라포프가 차에게 다그치자 시동이 걸립니다. 푸르륵 푸르륵 걸리는 엔진과 함께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범블비의 선곡! 바로 Player의 1977년 노래 <Baby Come Back>. 아니 이 타이밍에 이 음악이?! 극장에서 그 씬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습니다! 기가 막힌 연출이다....
이런 복고가 주는 '의외성', 그 신선함은 할리우드를 넘어 우리나라 영화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한국 영화계에서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할리우드의 영향이 막강했습니다. 그런 흐름에서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은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고, <써니>와 같은 대히트작은 영화판에서 '복고' 요소의 상업적 성공을 확인시켜주는 가열찬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국내 정치의 드라마틱한 지형 변화로 인해 요 몇 년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1970~80년대 배경의 많은 영화들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옛 음악이 흘러나왔고 급기야 1950년대 배경에서 1980년의 음악이 나오는 매우 과감한 시도(<스윙 키즈>)까지 등장했습니다.
21세기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20세기 추억의 올드 팝! 그 극적 연출이 주는 참신함은 많은 영화들에서 차용되어 관객을 매료시켰지만 십여 년이 흐른 지금은 평범함이 되었습니다. 영화적 장치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거죠(물론 기가 막힌 연출은 언제든 극적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10년 전의 신선함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범블비>에서 흘러나오는 올드팝들이 나쁜 게 아닙니다. 좋은 선곡들입니다. 다만 그것이 주는 극적 연출의 유효기간이 지난 것뿐이죠. 영화의 진부한 플롯과 캐릭터만큼 올드 팝의 삽입 또한 평범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이런 재탕 삼탕의 영화, 그렇다고 그런 평범함과 익숙함을 반전시킬 영화적 재미, 예를 들면 짜릿하고 화끈한 액션이나 매력적인 주인공도 없는 이 영화, 아무런 '노오력'이나 '시도'도 없는 이런 안일한 영화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연출이나 내러티브는 예전 <E.T.>나 <아이언 자이언트>가 훨씬 좋고, 액션은 기존의 <트랜스포머>가 훨씬 볼거리가 풍부한 상황에서 이 영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싶은 거죠.
그런데, 30년도 넘게 이어진 이런 익숙한 내러티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영화가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외계인/로봇의 소동이 주는 귀여움이나, 주인공이 그들과 쌓는 우정이 주는 따뜻함, 결말의 이별이 주는 안타까움과 슬픔 같은 정서들. 제가 <E.T.>와 <아이언 자이언트>를 처음 볼 때 느꼈던 그런 정서들을 21세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범블비>를 통해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죠. 만약 <범블비>를 재밌게 봤다면 <E.T.>나 <아이언 자이언트>를 꼭 한번 보세요. <범블비>보다 탄탄한 연출과 내러티브 때문에 더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와, 줄거리 진짜 똑같네"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