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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r 14. 2023

오스카 유감: '에에올'과 '탑건'

살짝 늦은 지극히 개인적인 오스카 그리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


네, 모두 아시듯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오스카를 휩쓸었습니다. 작년 <에에올>은 이미 해외 매체들로부터 매우 좋은 평을 받고 있던 상태에서 이동진 기자가 준 5점 만점과 함께 한국에서는 그 화제성이 정점을 찍기도 했더랬습니다. 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2번이나 보다가 중간에 시청을 그만두었었다가(;;) 오스카 이후 다시 정신과 자세를 부여잡고 얼마 전 끝까지 시청을 완주했습니다.


<에에올>이 좋은 영화임에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가족의 소중함'과 '타인을 향한 친절함과 사랑'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주제를 철학적인 상징들과 모티프 그리고 키치적이고 발랄하면서 과격하기까지 한 상상력으로 비범하게 그려냈죠. <에에올>의 리뷰와 비평은 너무도 많으니 오스카까지 휩쓴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에에올>이 이렇게까지 오스카를 휩쓸만한 영화인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립니다. 다른 영화제면 몰라도 오스카가 가지고 있는 오랜 전통과 보수성을 생각하면 말이죠. 무엇보다 <에에올>은 B급 영화적인 요소와 정서가 매우 짙은 영화입니다. 게다가 영화적인 완성도에서도 군데군데 불필요하다 싶은 부분들, 어설퍼보이는 만듦새들이 보입니다(이 어설퍼보임이 의도와 의도적이지 않음의 교묘한 경계에 있는 아주 묘한 상태입니다). 물론 그런 요소들이 전체적인 큰 틀에서 이 영화가 결말을 향해 탄탄하게 쌓아가는 플롯과 이야기의 큰 힘을 무너뜨릴 정도로 위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이렇게 많은 상을 받을 정도인가를 생각하면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죠.




저는 <탑 건: 매버릭>에게 더 많은 상, 더 중요한 상이 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탑 건>이 이룬 높은 기술적인 성취를 차치하고, <탑 건>은 코로나로 극장 산업이 최악의 고난의 행군을 걷던 시기 용감하게 개봉을 결정하고 좋지 않은 여건 속에서 대흥행을 시키면서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뭄의 단비가 되어 준 고마운 영화입니다. 무엇보다 <탑 건>이 보여준 놀라운 아날로그 액션은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만화 같은 그린 스크린 SFX가 판치는 느슨한 영화씬에 "이게 바로 기계의 금속과 인간의 피와 땀이 느껴지는 시네마"라고 죽비를 내려친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톰 크루즈와 그의 상업영화들을 오랫동안 깔보던 콧대 높은 수많은 영화인들 조차 <탑 건: 매버릭>의 용기와 성취에 큰 환호와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탑 건>은 다른 영화제는 몰라도 적어도 제 관념 속에 있는 아카데미의 의미와 가장 맞닿아있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서두에서 이번 <에에올>의 아카데미 수상에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지만 사실 <에에올> 돌풍은 예전과 달라진 아카데미, 지금 현재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재확인시켜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모두가 아시듯 '정치적 올바름'입니다. 지층 깊은 곳에서 서서히 쌓인 압력이 임계점을 지나면 화산 폭발로 이어지듯, '미 투' 운동을 기점으로 미국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높아져가던 '정치적 올바름'의 압력은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이라는 화산 폭발을 통해 그 임계점이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에에올>은 지금 미국의 영화계와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방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작품입니다. 여성 주인공 + 인종의 다양성 + LGBTQ 말이죠. 물론 여기에 미국 영화가 사랑하는 전통적인 가족애까지 들어있으니 아카데미로썬 모든 요소들이 완벽하게 합일된 완벽한 작품이었을 것입니다.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냐, 예술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언제나 의견이 분분하고 저마다의 대답과 의견이 다릅니다. 하지만 "메시지가 아름다움을 앞서서는 안 된다." 저는 예술이 무언가를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특히 그것이 정치적인 메시지일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역사를 통해 우린 예술이 어떻게 전체주의, 국수주의, 공산주의, 반공주의 등의 선동 도구로 쓰였는지 잘 봤습니다. 만약 예술이 정치적이려면 그것은 어떤 가치를 두둔하는 방식이 아닌 의문을 던지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호가 아닌 반문을 통한 가치 추구. 그것이 역사적으로 예술이 진보의 최전선에 있어왔던 이유이자 헤겔이 찬미한 이유기기도 합니다(역설적으로 그래서 정치적이기도 했지만..).


예전에는 정말 영화를 사랑했었습니다. 영화는 때론 세상에 지친 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거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아카데미 시상식은 축구팬에게 월드컵 결승과 같은 축제였습니다. 한 해 봤던 영화들을 돌아보고 나만의 리스트를 작성해서 아카데미 수상을 예측하고 시상식을 통해 최종 결과를 지켜보는 그 일련의 과정 자체가 월드컵 조예선부터 결승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주는 즐거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에 대한 애정이 꽤 식었습니다. 많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언젠가부터 영화들이 예전 같은 재미와 아름다움, 환희를 주는 예술이 아닌 메시지 주입을 위한 선동 도구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카데미 시상식도 예전 같은 '영화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넘실거리는 축제가 아닌 영화라는 도구를 통한 '정당대회'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기후변화나 민주주의, 성차별, 빈부격차 해소 등을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같이 뉴스와 신문, 다양한 매체에서 골치 아프게 듣는 그런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영화에서 또 보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이 극단적으로 좌와 우로 분열하는 지금, 영화에서 조차 그런 피곤하고 예민한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시민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지금 정치 과잉의 시대, 모두가 모든 것에 피곤하고 예민하고 분노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비무장지대처럼 우린 '비정치지대'가 필요합니다. 누가 어느 대통령을 지지하고 어느 정당을 지지하고 어느 가치를 지지하냐는 명찰과 완장을 떼고 자연인으로서 모두 극장이라는 한 공간에 모여 함께 울고 웃는 "공통된 경험"을 공유하고 향유하는 것, 그렇게 결국 우린 하나의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끼는 경험이 지금의 분절된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대단히 거대하고 비장한 것 같지만, 그저 그렇게 영화에서 만큼은 속세의 골치 아픈 피곤함에서 절연되어서 비현실이 주는 안식과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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