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deserves second chance, right?
<러덜리스>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올라있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주인공 샘은 광고회사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중역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총기 사건이 일어난 뉴스를 접하고 곧 그 범인이 자신의 아들이란 걸 알게 되죠. 그 아들은 총기 사건을 일으키고 곧 그 자리에서 자살을 합니다. 그 후 샘은 시골 마을로 가서 페인트칠을 하며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멍에를 안고 보트에서 살아갑니다. 어느 날 아들의 유품을 버리려다가 우연히 아들이 직접 쓰고 녹음한 노래 테이프를 발견합니다. 그 후부터 샘은 일하지 않는 시간은 보트에서 아들의 곡을 노래하며 보냅니다. 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잠깐 목을 축이기 위해 들른 바는 동네 아마추어 밴드들이 이따금 공연을 하는 라이브 펍. 모든 공연이 끝나고 취기가 오른 샘은 어쩌다 자신이 연습했던 아들의 노래를 한 곡조 뽑습니다.
그 모습을 본 쿠엔틴은 그 마을에서 살면서 아마추어 밴드를 하는 소심한 청년. 그는 샘에게 자신의 밴드에 합류하길 권합니다. 누구와도 연을 맺고 싶지 않은 샘은 극구 사양하지만 끈질긴 쿠엔틴의 요청에 결국 합류하게 됩니다. 여자와 말 한마디도 섞지 못하는 어수룩한 쿠엔틴, 그리고 별 볼 일없던 밴드는 샘의 합류로 활기를 찾고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샘은 아들의 곡들을 연주하고 그 곡을 연주하는 밴드는 라이브 펍에서 인기 밴드가 되고, 샘의 지도편달(!) 하에 쿠엔틴은 여자와도 꽤 어울릴 수 있는 사회성을 갖추게 됩니다. 아들을 잃은 샘, 아버지가 없는 쿠엔틴은 그렇게 부자 같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밴드가 지역의 나름 큰 공연 무대에 오르기 전 그들 앞에 나타난 아들의 전 여자 친구. 그녀는 자신은 여전히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아빠란 사람은 밴드를 차려서 밝게 지내고 있다며 밴드에게 샘의 아들이 누구였는지 폭로하죠. 쿠엔틴은 총기사건을 일으킨 사람의 곡을 자신들이 연주했다는 것과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밴드 멤버였다는 것에 분노합니다. 멍에를 안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던 샘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사람들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잊힌 줄 알았던 혹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사건은 샘을 다시 관계에서 밀어냅니다. 동네를 떠나기 전 샘은 라이브 펍에서 마지막 노래를 부릅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이 누구였는지 이야기하죠.
그는 동네를 떠나면서 쿠엔틴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비싼 기타를 선물합니다. 그리고 쿠엔틴은 새 멤버와 함께 밴드를 계속 이어갑니다.
이 영화는 범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됐는지 그 이유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을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도 그렇다고 새드엔딩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샘이 관계에서 결국 밀려난 건 새드엔딩이 맞지만 그를 통해 변화된 사람들이 있기에 마냥 새드엔딩이라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뉴스를 통해서만 사건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인, 그리고 범인을 그런 식으로 기른 부모를 너무도 쉽게 악마로 매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마을에서 그와 직접 교류하고 관계를 맺은 이들은 나쁘지만은 않은 사람으로, 누군가는 딱한 아저씨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니 그렇게 본다면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떤 것도 이 영화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저 과거를 잊지 못하고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샘을 담담히 그릴뿐입니다.
샘에겐 또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다시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외딴 시골 마을로 떠나는 그에겐 어떤 변화가 있을까. 그곳에서 더 사회와 등지고 살아갈지 아니면 쿠엔틴과의 밴드 활동을 통해 아들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을지 조금 더 마음의 치유를 받고 조금 더 사회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됐을지 알 수 없습니다. 샘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의 아들이 여러 명의 학생을 살해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샘이 아무리 성공적으로 새로 관계를 형성한다고 해도 언젠가 어느 시점에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 그때도 샘은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할까요. 영원히 샘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사람들은 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들을 살해범으로 기른 그를 영원히 배척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쯤에서 용서해 줄 수 있을까요.
이분법으로 간단히 상황을 나누고 감정 전시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주제를 다뤘다면 어떤 모습들이 펼쳐졌을지 예상이 됩니다. 살인자를 악마로 만들고 피해자들의 절규를 적나라하게 보여줬겠죠.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느 하나 단정 짓거나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샘의 구원을 요청하지도 그의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기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사람의 삶을 담담하게 조망하면서 사회가 그에게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다시 한번 기회를 줘도 되는지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지 가만히 묻습니다. 총기 사건이 갈수록 빈번해지는 미국 사회에도 잔잔하지만 묵직한 울림과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매정한(!) 닥터 스트레인지는 피터와 그 친구들에게 일어난 일은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온 악당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 악당들은 다시 예전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하죠. 그에 반해 피터는 모두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길 원합니다. <노 웨이 홈>이 비록 활개 치는 악당들에 시민들이 위태로워지고, 시공간이 뒤틀려 세계가 멸망할 처지에서도 고집만 부리는 피터를 마치 '트롤'처럼 그린 탓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재기'와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피터 덕분에 친구들은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꿈꾸던 대학에 진학하게 됐고, 이전 스파이더맨들은 구원을 얻었으며, 악당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사실 이 모든 글의 시작은 며칠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접한 배우 박혜수의 노래 때문입니다. <스윙 키즈>와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에서 본 것 같긴 하지만 큰 인상은 주지 못했던 배우. 그러다 우연히 아래의 기분좋고 해맑은 영상을 보고 귀엽고 노래를 잘 하는 배우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댓글을 보고 그 배우의 과거 문제가 불거져 활동을 접게 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지난 몇 년간 각종 사건사고 때문에 활동을 접게 되는 연예인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이 사라지기 전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 시기에 촬영됐던 영상을 보는 건 언제나 참 묘한 감정을 들게 합니다. 앞으로 어떤 지옥 같은 삶이 펼쳐질지 알리 없는 그들은 영상 속에서 너무나 밝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연기하고, 웃고, 이야기하고, 노래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랐던 사람들 역시 그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멋진지 댓글에 남기죠. 그리고 댓글창은 사건 이후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슨 낯으로 대중 앞에서 웃으며 활동했는지 소름이 끼친다거나,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았겠다거나,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겠다는 등 다양한 댓글로 채워집니다. 어떻게보면 인과응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롤로코스터처럼 한 순간 꺼져버리는 삶이 부조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과연 이상적인 사회, 성숙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한국 사회는 청렴결백함과 순수함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기에 사회가 마치 무균실 같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욕정도 스캔들도 폭력도 부정부패도 없는 완전무결한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릴 적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온전하고 완전한 사회. 오직 선함만 있고 모두가 행복한 사회. 하지만 많은 것을 듣고 접하고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회는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 없는 환상이라는 걸. 그렇다고 제가 그런 사회를 바라지 않는 건 아닙니다. 완벽한 사회를 원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런 완벽한 사회가 단 한순간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면, 과연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게 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인식일까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유니콘 같은 사회를 추구하는 것? 그래서 그런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람은 모두 탈락시키는 것? 아니면 현실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악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것을 것입니다. 저는 후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악한 본성이 있고,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실수하지 않고 많은 것을 욕망하지 않고 욕정을 품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는 '인간적임'에서 가장 멀리있는 기계적인 사회, 가장 인공지능이나 로봇에 더 가까운 사회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너무나 쉽게 지적하고 욕합니다. 절대 용서하면 안 되고 사회에 복귀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지탄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사건사고를 접하든 우리도 저 사건의 당사자, 가해자가 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함부로 쉽게 누군가를 비난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린 큰 범죄나 실수가 온전히 그 행동을 저지른 당사자의 잘못이라고만 한정 짓지만, 한 개인의 행동에는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끼칩니다. 잘못된 부모를 만났을 수도 있고, 잘못된 친구를 만났을 수도 있고, 어리고 성숙하지 못해서, 아니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큰 잘못이 아니라고 대수롭게 생각해서, 우연히 그런 상황이 벌어져서 등등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수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많은 부분이 '운', 혹은 '팔자'라고 말하는 것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어쩌면 우린 운이 너무 좋아서 뉴스의 주인공이 되지 않고 무탈하게 지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언제든 우린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이었을 수 있고, 앞으로 예상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지금 모든 일이 잘 되고 무탈한 상황이 100% 내가 잘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되고 더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처지에 있는 이를 함부로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못합니다.
한 번이라도 잘못한 사람의 이마에 주홍글씨가 박히는 사회란 얼마나 냉혹한 사회입니까.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시인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당사자가 용서를 했다면 사회는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응당한 처벌을 달게 받고, 처벌을 다 받았다면 더 이상은 묻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몇몇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법적이든 도의적이든 큰 부침을 겪으며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벌인 행동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불행이었는지, 그 행동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직접 경험하게 되면 대부분은 반성을 하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용서와 처벌의 갈림길에 있을 때 만약 용서를 받는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숙하고 이상적인 사회는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이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고 포용하는 사회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사회야 말로 다양성이 존중받고 창의적인 생각과 실험이 가능하며 자유로운 행동과 사고가 가능하고 사회 구성원 서로가 서로를 더 존중하는 인간다운 사회가 아닐까 합니다. 성숙함은 그저 자동적으로 떡국을 먹는 횟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여러 고난과 부침을 통해 마음의 굳은살처럼 조금씩 얻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분명 실수와 잘못이 있을 수 있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조우하면서 진정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동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누군가 그런 큰 용기를 내 손을 내밀었을 때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런 사회는 삭막하고 차가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 진정으로 반성하면서 용서의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을 잡아준다면, 인간 대한 존중과 믿음, 관계에 대한 소중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 조그만 사건과 관계들이 연결될 때 그 사회를 인간적이고 성숙하고 이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는 사라진 연예인의 과거 영상을 보면 다시 그 사람의 멋진 연기와 노래를 보고 싶어하는 '바람'과 보고 싶어 하면 안 된다는 '도덕' 사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 영상의 댓글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좋았겠다"라고 댓글을 다는 것이 고작 전부인 사회보다 "너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정말 반성하고 당사자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라. 그 용서가 받아진다면 우리도 당신을 용서할 수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당사자가 치유를 받고 당신도 성숙해져서 더 멋진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댓글을 많은 사람이 달 수 있는 사회가 더 멋진 사회 아닐까요.
정확히 말해서 이런 장문의 글을 쓰게 된 건 위에 링크한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에서 세 명의 배우를 보고 박혜수 배우가 인상에 남아 다른 영상들을 찾아보다 발견한 위의 영상 때문입니다. 화질도 음질도 별로 안 좋은 이 영상을 보는데 이상하게도 지난 일들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건 본인 역시 가슴에 어떤 큰 멍에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어떤 삶의 굴곡을 겪었을 지. 이렇게 멋진 재능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줄 수 있을텐데, 참 여러모로 안타깝습니다. 물론 그녀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모든 당사자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