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의 <사모>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읽지 않는 편이지만 꼴에 또 저 나름 좋은 시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의 언어는 바닷물에서 얻은 소금과 같아야 한다. 한 양동이의 바닷물을 증발시키고 증발시키고 또 증발시키면 그 자리에 남는 소금이란 한 줌도 채 안 되는 양이지만 그 미량의 소금이 양동이 전체의 바닷물을 결정짓는 것처럼, 시는 불필요한 언어를 깎아내고 걷어내고 쳐낸 끝에 남겨진 말하자면 관념의 소금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양동이에 가득 차 있는 관념의 편린들을 쏟아내고 재조립하고 풀어내고 재조립하고 걷어내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 행, 한 단어, 한 글자가 자존할 가치를 지녀야 하고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위치하면서 양동이 속 헝클어진 상념을 온전히 하나의 표상으로 보여주는 것. 그런 언어의 예술. 그래서 시는 언어로 할 수 있는 예술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든 예술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접하게 되는 요즘 시는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바닷물을 퍼온 양동이를 그냥 덩그러니 갖다 놓은 느낌, 더 심하게는 중학교 1학년 아이의 일기장 같은 느낌, 더 심하게는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 시들이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게, 신박하게, 기발하게 받아들여지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위안이 될 수 있겠습니다. 별의별 것들이 모두 예술의 범주로 편입되는 요즘, NFT라는 미명으로 온갖 것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수백억에 사고 팔리는 지금, 어떤 것인들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만은, 자신만의 기준이 없다면 요즘 같은 시기 너무 쉽게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되어 버리겠죠. 적어도 저만의 기준에 요즘 시들이 눈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접한 조지훈의 <사모>.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없는 그 "청록파" 시인.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아무 생각 없이 외우고 지나쳤던 많은 수필과 시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절절한 것이었는지 눈 뜨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모>를 교과과정에서 배운 기억은 없지만 그때 접했어도 어린 저는 아무 감흥이 없었겠죠. 그땐 몰랐을 것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내가 이토록 이 시를 절절하게 느끼게 될 줄.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행이 정말 정말 아쉽습니다.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로 끝냈으면 좋았겠다 싶지만, 시인은 이런 고통 또한 삶의 한 부분, 이 또한 운명이 아니겠냐고 너무 슬픔의 심연으로 한 없이 침잠해 들어가고만 싶진 않았나 봅니다. 오랜만에 읽고 또 읽고 또 읽은, 그리고 또 읽을 시를 만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