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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Oct 05. 2023

울타리 강박증에 사로잡히다

나의 로스트 밸리는 나를 보호하는 장치인가 가두기 위한 속임수인가

에버랜드 로스트 밸리가 문을 열었다는 광고를 본 그 순간부터 언젠가 꼭 갈 거라고 노래를 불렀다. 로스트 밸리가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사파리월드가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 나 역시 사파리월드를 가 본 적이 있지만 현란한 무늬의 커다란 다인승 버스에 올랐던 것 말고는 기억이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려동물보다는 야생 동물을 좋아하는 내게 로스트 밸리의 개장은 충격적인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로스트 밸리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거리가 멀어서 또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늘 다음으로 미뤄졌다.


남들보다 대학 입시를 오래 준비했지만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하면서 인생 역전의 아이콘이 된 친구가 있다. 친구가 일하게 된 곳은 아쿠아리움이었는데 직원 찬스로 지인들을 들여보내줄 수 있어서 영광스럽게도 초대를 받았다. 나는 로스트 밸리를 못 가고 있던 설움을 풀고자 초대에 넙죽 응했다. 아쿠아리움에 가기로 한 전 날, 해양 생물과 관련된 다튜멘터리를 찾아보며 여러 종의 펭귄을 익히고 바다코끼리, 바다사자, 바다표범의 차이도 공부해 갔다. 친구를 따라 아쿠아리움 입구에 줄을 섰을 때만 해도 들뜬 나머지 주변의 어린아이들처럼 바다코끼리와 피라니아 모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아쿠아리움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처음과는 정반대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아쿠아리움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터널형 수조를 지나 탁 트인 광장에 다다르니 2층 규모의 거대한 수조가 펼쳐졌다. 날개를 펼친듯한 가오리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나갔고 크기는 가오리보다 작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상어가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면을 가득 메운 거대한 수조를 봤을 때 첫 반응은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유유자적한 동물들의 헤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질 거라 생각했던 것도 잠시, 커다랗다고 생각했던 아쿠아리움 속 켜켜이 쌓여 헤엄치는 동물들의 모습은 점점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어느덧 나는 아쿠아리움을 보며 탁 트인 바다가 아닌 다습하기만 한 수조를 떠올렸다.


우리가 보기에는 커 보여도 아쿠아리움이 고래에게는 침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고래가 아무리 열심히 헤엄쳐도 눈앞의 대형 수조를, 침대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자유롭게 헤엄칠 수 없는 동물들을 보며 관람자로서 느낄 수 있는 오만한 동정에 취했을 때쯤 이들의 자유를 불쌍히 여길 만큼 나는 자유로운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들의 신세를 감히 나의 현실에 비유하는 것 역시 오만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인간이라서 동물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동시에 나의 처지를 비관했다.




내가 사는 곳은 어떻게 봐도 철창이나 두꺼운 유리가 가로막고 있는 동물원이나 수족관아니다. 자유로워 보이고 철창도 유리도 보이지 않지만 절대 넘어갈 수 없는 구역이 정해진 곳, 로스트밸리다. 렇다면 누가 구역을 만들고 구역을 벗어나지 말라고 주입시켰을까? 늘 자유를 갈망하면서 사무실 책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벗어나면 두려움을 느끼는 큐비클 인생을 살도록 한 것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인가 사회적 관습인가. 모순적이게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관습이라 칭하며 나를 가두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자발적으로 직장이라는 굴레를 스스로에게 씌운 나는 사실 아쿠아리움과 동물원의 동물들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에 가둬놓고 야생의 단편을 보며 즐거워했던 어린 시절에서 못 벗어난 것은 아닐까? 내가 즐거워했던 야생의 단편이 그들에게는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들의 울타리를 비판하는 동시에 나 자신에게는 울타리를 집이라 말하며 안정감을 강요했다. 내게는, 아니 다른 누군가에게도 울타리 강박증은 있을 수 있다. 울타리 안에 넣어두고 즐거워하거나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안정감을 강요하는 것. 나는 과연 그것을 깨부술 수 있는가, 아니, 깨부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가. 나의 로스트 밸리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가 나를 가두기 위한 속임수인가. 혹시 자유에 따른 책임이 무서워서 회피하 위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아쿠아리움이나 동물원에서 태어난 동물이더라도 야생 환경에 대한 적응기를 거치고 나면 야생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 적응기간 동안 동물은 본능을 이용해 주변 환경을 몸에 익히고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다. 하지만 모든 동물이 야생에 잘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적응기간을 거친 후 방생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안타까운 결말을 맞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결말을 보며 누군가는 "그냥 동물원에 뒀으면 살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처음부터 야생에 뒀다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라고 할 것이다.


방생 후 안타까운 결말을 맞은 동물들을 보며 나는 후자의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내 인생을 대입한다면 전자로 결론지어질 것이 두려워 적응기든 뭐든 거부하고 야생조차 꿈꾸지 않는다. 나도 적응기를 가진다면 본능에 따라 야생의 자유를 탐닉하고 끝내 자유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자유가 과연 동물적인 본능에 따른 자유인 걸까 아니면 인간적인 감성에 취한 자유인 걸까? 해답을 모른 채 세상이라는 로스밸리 속에서 나 스스로를 가두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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