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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Jul 05. 2023

비 온 뒤 찾아온 물기 가득한 아침

폭우로 걱정스럽던 밤을 무사히 넘긴 다음 날

어젯밤부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출근할 때만 해도 장화를 신은 것이 유난스럽지는 않나 고민이었는데 퇴근길에는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증명됐다. 집에 돌아와 샤워로 더위와 습도를 밀어내고 오랜만에 뉴스를 틀었다. 뉴스는 온통 비 얘기뿐이었다. 비가 땅으로 무섭게 내리 꽂히는 장면이 아니면 기상청 레이더를 통해 보는 비구름 지도가 펼쳐졌다. 작년처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비가 내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비도 비지만 높은 습도와 더위 속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됐다. 행여 비가 들이칠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방음이 잘 돼서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비가 안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창문 한 번 열지 않고 후덥지근한 공기를 견뎌가며 출근준비를 서두르고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비의 여운으로 습한 기운이 섞여 있었지만 한동안 자연바람이라고는 고온의 심심한 바람뿐이었기에 반가웠다. 조금이라도 더 자연이 불어주는 바람을 맞고 싶었으나 지하철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한강 이남을 관통하는 급행열차는 출퇴근 시간이든 주말이든 상관없이 붐비지만 어느덧 관록이 생겨서 빈틈없이 사람으로 가득 찬 열차 안에서도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어제만 해도 팔다리가 우산에 부딪히며 땀과 빗물이 섞여 끈적했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건조해진 피부에 에어컨 바람까지 불어오니 산뜻했다.




지하철역을 벗어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면서 어서 빨리 밖으로 나가 선선한 바람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무사히 넘긴 지난밤에 대해 나 혼자만의 자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스타벅스 앱을 켰다.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가 스타벅스다 보니 조금 가격대가 있더라도 여유롭지 않은 출근길에는 스타벅스를 자주 이용한다. 오늘은 커피보다는 밀크티가 어울리는 날이라 돌체블랙 밀크티를 주문하고 천천히 가게로 향했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아 젖은 보도블록, 군데군데 보이는 물웅덩이, 회색빛의 구름으로 덮인 하늘이 비가 지나간 흔적이 되어 남아 있었다.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 잠시 앉아 찰나의 여유를 즐겼다. 점심시간에는 가게에서 틀어주는 음악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 곳이지만 아침에는 공허할 정도로 자리가 비어있다. 드문드문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카페로 출근하고 싶다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페로 출근하는 것 역시 일하러 '출근'하는 것임은 다르지 않으니 분명 고충이 있겠지.



잠긴 목소리로 카운터 너머에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따듯한 밀크티를 받아 들었다. 그제야 오늘 일어나서 처음으로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의 첫마디가 감사인사인 것 자체도 참 감사한 일이다. 카페 바로 뒤에 위치한 회사까지 서두르면 1분 안으로 도착하지만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이라도 마음이 닿아야 걸음도 서둘러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설렁설렁 보폭을 줄여 한 걸음씩 뗄 때마다 발밑에 고요하게 고여 있는 웅덩이를 감상했다.




지난밤에는 뉴스를 보며 오늘 출근을 걱정했다. 한편으로는 작년처럼 갑작스럽게 출근시간을 공식적으로 늦춰주지는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밤새 내리는 비에 마음 졸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어린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의 이기적인 생각을 억누르지 못했다. 회사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는 TV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김없이 날씨에 관한 소식이었다. 아침까지 내릴 거라던 비는 비구름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그쳤다. 하지만 어제만 해도 폭염을 겪었던 도시가 오늘은 비구름 아래서 폭우를 감당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안도의 숨을 내뱉는 아침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숨을 내뱉는 아침일지도 모른다.


장마는 이제 겨우 첫발을 뗐을 뿐이고 앞으로 수많은 빗물을 우산으로 막아야 한다. 우리의 우산이 빗물을 견딜 정도로 튼튼하기를, 우리의 지붕이 빗물에도 무너지지 않기를, 울창한 뒷산이 빗물을 흠뻑 마실 정도로 든든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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