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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May 31. 2022

넘버 원, 온리 원, 보아

아직도 그에겐 가고자 하는 길이 남아 있다.

미리 말하자면, 여기서 보아(BoA)의 지난 커리어를 모두 돌아보는 건 불가능하다. 보아가 지난 22년간 한국과 일본, 미국을 오가며 발표한 정규 앨범만 스무 장이다. 앨범 판매량은 총 천만 장이 넘는다. 차트를 휩쓴 히트곡과 각종 기록, 수상 내역도 셀 수 없이 많다. 관련 자료는 인터넷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이다. 언제까지 보아를 ‘한국인 최초로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가수’, ‘한국인 최초로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에 진입한 가수’로만 기억할 수는 없다. 보아는 멈춰있는 아티스트가 아니다. 이 글은 현재 진행형 보아에 관한 글이다.


물론 보아의 지난날은 눈부셨다. 데뷔 후 첫 5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열다섯 살 천재 소녀로 가요계에 등장했던 ‘ID; Peace B’(2000), 천신만고 끝에 오리콘 차트 정상에 올랐던 ‘Listen To My Heart’(2002), 금의환향 후 돌아와 전국을 보아 열풍으로 몰고 갔던 ‘No.1’(2002)과 ‘Valenti’(2002)까지. 이뿐인가. 활기찬 이지 리스닝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아틀란티스 소녀’(2003), 정반대의 콘셉트와 퍼포먼스로 충격을 안긴 ‘My Name’(2004), 여성의 목소리를 드높인 ‘Girls On Top’(2005) 등 보아의 처음 5년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시아의 별’이란 별명은 이미 이때 생겼다.


<Only One> (2012)


지금의 보아를 바로 보기 위해선 10년 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2012년은 보아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직접 만든 노래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정규 7집 <Only One>(2012) 이야기다. ‘Only One’은 보아의 여느 타이틀곡과도 달랐다. 서정적인 발라드 곡조에 미디엄 템포 댄스 리듬이 결합한 노래는 보아의 가창력과 춤 실력을 다시 한번 부각했다. 동시에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그저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가수인 줄 알았던 보아가 노래까지 만들다니. ‘Only One’은 보아를 싱어송라이터로 떠오르게 했다.


‘Only One’이 보아의 첫 자작곡은 아니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노래를 앨범에 실은 건 그보다 10년 앞선 2002년이었다. 첫 번째 일본어 앨범 <LISTEN TO MY HEART>의 ‘Nothing’s gonna change’, 두 번째 한국어 앨범 <No.1>의 ‘Dear My Love’다. 단순하지만 꾸밈없는 멜로디가 아름다운 노래였다. 이후로도 한동안 보아의 송라이팅 비중은 이 정도에 머물렀다. 한일 앨범의 가사를 몇 곡 쓰고, 간혹 한 곡 정도 노래를 썼다. 이런 추세는 그가 미국 진출을 하기 전인 2008년 초까지 이어졌다.


<IDENTITY> (2010)


보아가 창작자로 전면에 나선 건 2010년이었다. 미국에 다녀온 후 작업한 일곱 번째 일본어 앨범 <IDENTITY>(2010)에서 그는 절반 이상의 수록곡을 직접 만들고 프로듀싱까지 참여했다. 데뷔 후 처음으로 도전한 셀프 프로듀싱이었다. 그는 앨범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능숙하게 다루는 한편, 자전적인 이야기를 곳곳에 배치해 듣는 이와 인간적으로 교감했다. 이전까지 보아의 앨범이 팝 스타 보아의 앨범이었다면, <IDENTITY>는 인간 보아의 솔직한 심정이 담긴 작품이었다. 데뷔 앨범부터 6집 <THE FACE>(2008)까지 이어진 보아의 오리콘 앨범 차트 연속 1위 기록은 이 앨범에서 깨졌지만, 그는 훗날 이 시기를 “더 올라갈 곳이 생겨 마음이 편했다”고 떠올렸다.


이 무렵부터 국내 앨범의 짜임새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사실 전작 <Girls On Top>(2005)까지만 해도, 보아의 한국 앨범과 일본 앨범의 밀도 차이를 비교하는 볼멘소리가 종종 나오곤 했다. 5년 공백 끝에 발표한 여섯 번째 한국어 앨범 <Hurricane Venus>(2010)는 이러한 지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앨범은 구성 면에서 지금까지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직접 작사, 작곡에 참여한 곡들이 늘어나면서 그만의 색깔이 짙어졌고, 김동률, 김종완 등 기획사 외부 음악가와의 협업으로 음악적 저변을 넓힌 것이다.


‘Only One’은 이러한 흐름에서 나왔다. 앨범 작업의 참여 비중을 높이고, 음악 주도권을 점차 확보해가던 중 나온 단비 같은 노래였다. 처음부터 타이틀곡이었던 건 아니다. 당초 앨범에 실린 ‘The Shadow’를 타이틀곡으로 내정하고 작업하던 중, ‘Only One’을 들은 이수만 프로듀서의 제안으로 타이틀곡이 뒤집혔다. 노래의 잠재력을 포착한 결정이었다. 앨범의 리드곡이 된 ‘Only One’은 한 편의 뮤지컬 같은 퍼포먼스와 만나 완벽한 시너지를 냈다. 보아 스스로도 자신의 곡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노래이자 퍼포먼스라고 할 만큼, ‘Only One’은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Kiss My Lips> (2015)


2015년에 발표한 정규 8집 <Kiss My Lips>는 명실상부한 야심작이었다. 보아는 데뷔 15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의 전곡을 작사, 작곡했다. 프로듀싱 또한 직접 맡았다. 활동을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앨범에는 몽환적이고 성숙한 ‘Kiss My Lips’와 밝고 선율감이 돋보이는 ‘Who Are You’를 필두로 어쿠스틱 팝, 발라드, 댄스 팝, 일렉트로닉, 탱고 등 다채로운 12곡이 실렸다. 그는 이를 팬을 위한 선물이자 자신을 위한 선물이었다고 설명했다. 아이돌 가수로 활동을 시작한 소녀가 성인이 되어 손수 만든 앨범 한 장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면 모두에게 값질 것 같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Kiss My Lips>는 뜻깊은 앨범이었다. 일부 공동 작곡을 고려하더라도, 국내에서 댄스 팝 가수가 앨범에 실린 모든 곡을 만든 경우는 지금까지도 흔치 않다. 여성 가수로는 유일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순 도전에 그친 게 아니라, 탄탄한 완성도까지 갖춘 수작이었다. 보아의 작법은 이 앨범을 만들면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오랜 일본 활동으로 체화한 멜로디 감각, 일상적인 언어로 장면을 묘사하듯 쓰는 감성적 노랫말, 팝 전반을 아우르는 사운드 활용이 보아 표 음악의 주요 특징이다. 이때부터 보아의 앨범은 확연히 깊어졌다. 


보아는 <Kiss My Lips> 활동 후 가진 인터뷰에서 좀 더 유연한 활동에 대한 뜻을 내비쳤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음악 시장이 디지털 음원 중심으로 재편되고 싱글과 미니 앨범(EP)이 활성화된 후에도 정규 앨범 단위의 활동을 고집했다. 앨범 사이의 공백은 자연히 길어졌고, 다양한 음악을 시도할 기회도 적었다. 부담 없이 많은 공을 던질 수 있는 활동을 해보고 싶다던 그는 색다른 음악으로 대중과 호흡했다. 래퍼 빈지노와 함께한 ‘No Matter What’(2016), 시네마틱한 알앤비 사운드를 들려준 ‘봄비’(2017), 퍼포먼스에 역점을 둔 전위적 ‘CAMO’(2017)까지. 보아는 부지런히, 또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며 세상과 보폭을 맞췄다.


<ONE SHOT, TWO SHOT> (2018), <WOMAN> (2018), <Starry Night>(2019)


데뷔 19년 차에 낸 첫 번째 EP <ONE SHOT, TWO SHOT>(2018) 역시 그 연장선이었다. 앞서 발표한 ‘CAMO’를 포함해 7곡이 실린 앨범에는 딥 하우스(‘ONE SHOT, TWO SHOT’), 힙합(‘내가 돌아’), 알앤비(‘YOUR SONG’, ‘ALWAYS, ALL WAYS’), 미디엄 템포(‘EVERYBODY KNOWS’) 등 서로 다른 스타일의 노래가 실렸다. 감수성 넘치는 자작곡(‘RECOLLECTION’)도 빠지지 않았다. 정규 앨범과 다르게, 보아의 음악 세계를 넓히는 데 중점을 둔 듯 보였다. 정규 디스코그래피와 EP 및 싱글의 기조를 분리해 폭넓게 운용하려는 인상이었다고 할까.


정규 9집 <WOMAN>(2018)과 두 번째 EP <Starry Night>(2019)는 음악적으로 완연히 무르익은 작품이었다. 특히 수록곡 면면이 뛰어났다. 여러 작가와 장르를 오가며 고감도 멜로디를 펼쳤고, 이를 한 장의 앨범으로 매끈하게 엮어냈다. 빈틈없이 꽉 찬 두 앨범의 유일한 약점은 의외로 타이틀곡이었다. ‘Woman’은 메시지 측면에서 ‘Girls On Top’과 이어지며 유의미한 감상을 끌어냈지만, 음악적 쾌감은 앨범에 실린 수록곡에 미치지 못했다. 크러쉬와 함께한 이지 리스닝 ‘Starry Night’는 장르적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다소 밋밋하게 들렸다. 타이틀곡에서만큼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과 대중에게 가닿을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맞이한 20주년. 그러나 앨범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웬만하면 데뷔 20주년이 되는 날에 내고자 했지만, 완성도를 위해 일정을 몇 번이나 미뤘다. ‘20주년’보다 중요한 건 ‘20주년을 맞은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기에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20주년을 넘기기 직전 가까스로 나온 앨범이 <BETTER>(2020)였다. 기다림의 가치는 충분했다. 타이틀곡 ‘Better’는 정교한 만듦새 아래 그만의 개성과 매력을 모두 챙긴 노래였다. 어쩌면 보아의 커리어 사상 가장 뛰어난 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타이틀곡을 대하는 고민이 마침내 풀린 것 같았다.


<BETTER> (2020)


앨범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보아의 최고작이었다. 20년 내공이 집약된 결과물이랄까. 스펙트럼은 그의 특기인 댄스 팝과 발라드는 물론, 당대의 유행을 반영한 퓨처 디스코, 로 파이(low fi) 질감의 알앤비, 재즈 퓨전까지 뻗어갔다. 탁월한 11곡은 각각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면서도 물 흐르듯 유려한 구성미를 뽐냈다. 앨범 미학을 충실히 구현한 <BETTER>는 보아의 디스코그래피 상에서는 물론, 같은 해에 나온 케이팝 앨범을 통틀어도 단연 손에 꼽을 만한 걸작이었다. 20년을 활동하면서 스무 번째 만든 정규 앨범에서 이 정도의 색깔과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는 가수가 얼마나 될까.


보아의 첫 10년과 그다음 10년은 이렇게 다르다. 데뷔 후 10년의 궤적이 특급 팝 스타로의 도약과 음악적 토대 마련이었다면, 이후 10년은 시대와 동행하는 팝 싱어송라이터로의 성장 이력이었다. 새롭게 시작된 10년은 성실히 쌓아 온 관록과 역량을 한껏 펼치는 시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자신도 “이제는 작품을 남겨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보아가 발표한 앨범 중 가장 빼어난 <BETTER>가 보아 음악의 정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직도 보여줄 것이 많은 그는 앞으로 또 다른 근사한 앨범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음악가 보아에겐 그 정도 믿음이 있다.


일본 데뷔 20주년 기념 앨범 <The Greatest>(2022)


팝, 그중에서도 댄스 팝은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음악이다. 그 어떤 음악보다도 현재 진행형인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댄스 팝 뮤지션에게 대중과의 멀어짐은 숙명과 같다. 한 시절을 풍미하고 과거의 영광으로 기록된 댄스 가수가 얼마나 많은가. 이를 거부하고 어떻게든 새로운 음악으로 대중과 거리를 유지하는 이들이 거장으로 남는다. 그와 같은 영예는 마돈나(Madonna)를 비롯한 극소수만이 누렸다. 보아 역시 그렇다. 그는 대중이 예전 그의 모습을 기억해주길 바라지 않는다고, 그냥 지금의 자신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보아는 그렇게 여전히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다. 이미 멀고도 찬란한 길을 왔지만, 아직도 그에겐 가고자 하는 길이 남아 있다.




본 글은 당초 빌보드 코리아 매거진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빌보드 코리아의 내부 사정으로 발행이 지연되어 브런치에 먼저 공개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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