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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가오니 Jun 01. 2019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금요일 밤.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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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막힐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지배한다. 첫 장면을 장식하는 ‘그나마’ 태양빛이 들어오는 반지하 방의 맨 위에 매달린 양말 빨래처럼 사회적 층위의 위로 올라가기 위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경계선에 매달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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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계선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그들은 스스로 부자들과 자신을 경계 짓는다. 부자들은 구김살 없이 꼬이지 않았다면서 돈을 마음의 다리미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쌓여가는 그들에 대한 불만과 섞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증오로 종국에는 지나가는 그들의 몸짓과 말 한마디에도 참지 못하고 하수구가 빗물에 역류하듯 지하 깊숙한 곳에서 거꾸로 올라와 선을 넘고 폭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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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위작가는 내게 까뮈의 이방인을 얘기했다. 소설에서 살인의 이유가 단지 태양빛이었다는 표현과 그때의 해변에서 뜨거운 태양을 맞이하는 뫼르소가 떠올랐다고. <기생충>에서 햇빛이 들지 않던 반지하를 벗어난 가족들이 호젓하게 대저택의 지상을 즐기는 장면이 겹쳐 떠올랐다. 그 시퀀스에서 아들이 정원에 누워 온 몸으로 햇빛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소설 이방인이 장면들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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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로 점철된 것은 까뮈의 이방인을 읽는 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촘촘한 사회적 층위 속에서 구분되고 서로 섞일 수 없다고 스스로를 제어하는 학습된 수동성은 마치 부르디외가 나타나 아비투스를 역설하는 듯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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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까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뫼르소가 감옥에 들어간 후 되뇌는 ‘자유로운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부분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 강남의 불야성과 고층 빌딩. 창 밖의 지나가는 야경은 아름답지만 목적지가 정해져 있기에 실재하지 않고 흘러 사라지는 모습들일뿐인가. <기생충>은 끊임없이 묻는다.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속에서 족쇄를 벗어난 것 같이 생각하고 행동해도 숙주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기생충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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