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권과 일본은 게임 속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작은 세상에 함축되어 있는 드넓은 세상
분재(Bonsai, 盆栽)에 관심을 가져보신 적 있나요? 자연과 풍경을 작은 화분 속에서 표현하고 감상하는 활동 일체를 분재라고 부릅니다. 이 작디작은 분재 작품 속에서 때로는 자연의 풍광과 함께 푸르른 대자연이 느껴 지도하고, 안온한 정원에 편하게 앉아 있는 느낌을 받고는 합니다.
갑자기 분재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오늘의 주제 <나는 '존재한다' 고로 플레이한다>의 서술 관점을 부연하기 위해서입니다.
분재처럼 작은 화면 속에서 내가 움직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체감한 게임 속 세상은 작은 방에서 게임패드를 잡고 있는 나의 모습과 대비되는 넓은 게임 월드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 시절 즐겨하던 <원더보이>는 버튼을 누를 때마다 게임 속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하러 떠나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원더보이>는 현재는 찾아보기 힘든 소형 용량 하드디스크 1GB(1024MB)의 1/6144 크기의 168KB 메모리에 담겨있습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용량입니다. 이 당시의 게임기판을 보면 마치 분재(Bonsai, 盆栽) 작품의 밀도감을 보는 것처럼 마이크로칩들이 빼곡하게 촘촘히 박혀있습니다.
1980년대 비디오 게임의 초창기는 성능 제약 속에서 압축하고 축소시킨 집약의 미학이 있었던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기판이 만들어내는 게임 화면 속에서 수도 없이 모험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분재가 대자연을 압축한 축소의 미학인 것처럼 현실의 내가 다양한 세상이 압축된 게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서구권과 일본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있다) ,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
삶의 여정을 닮은 깊고 드넓은 게임 세상 속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 <Journey>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이 게임 화면 속에서 저는 미지의 게임 세상 속을 여행하는 고독한 여행자였습니다. 하지만, 엔딩 스탭 롤이 올라갈 때 '나 혼자가 아니었구나'라는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독하다고 생각했던 여행 중 저를 중간 도와주던 NPC(데이터에 의한 가상의 움직이지 못하는 캐릭터)라 치부했던 게임 내의 여행자들이 전 세계 어딘가에서 이 게임에 접속해서 저처럼 고독하게 여행하던 플레이어였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 안에서 '나'란 존재는 타인을 때로는 도와주고, 때로는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관계성이 만들어내는 여운은 스탭 롤과 함께 나와 함께 이 세계를 여행한 사람들의 닉네임이 끝나갈 때까지 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서구권의 게임에서는 게임 속 '나'란 존재는 여행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Journey>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비디오 게임(Stand Alone)은 알 수 없는 게임 세상 속을 모험하여 점진적으로 '나'를 둘러싼 '게임 월드'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FPS 장르 어드벤처 <Unfinished Swan>를 한번 보겠습니다.
흰 배경의 게임 세상 속에서 잉크 볼을 던지면서 게임 속 세상을 비로소 조금씩 인지할 수 있습니다. 검은 잉크로 형체를 인식하기 전까지 의심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마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있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심을 '나'의 내면에 담긴 지식으로 성찰하는 장면처럼 우리는 이 게임에서 철저하게 오로지 '나'를 둘러싼 세상을 파악해가는데 오롯이 집중하게 됩니다.
이렇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未知)를 탐험해가는 방식에 대해 일본의 게이머들은 회의적이었습니다.
WIRED가 10년 전 재밌는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일본이 '서구권 게임'을 싫어하는 이유
기사의 얘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이드가 불친절하다
자유도가 높아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기가 어렵다.
이어서 일본의 비디오 게임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 집단 CAPCOM 출신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 플랫폼 액션 게임 <록맨>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나후네 케이지씨의 코멘트를 이어서 살펴보도록 해보죠.
일본은 계획이 있고 가이드가 있어 집중할 포인트가 있는 것을 원한다.
단순히 얘기해보면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변화, 전개할지 모르는 것을 보면 진정이 안된다.
이것이 일본의 RPG 게임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공격 순서, 전투 중 사용 정보, 적의 정보가 명확하게 목표로 이어져있다.
정리해보면, '자신의 입지(立ち位置)를 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로 표현해볼 수 있습니다. 입지를 파악하려면 타인 또는 적과 동료의 관계는 늘 중요합니다. 적과 아군의 구분,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일본의 게임에서는 '나'란 이렇듯 '남과 나의 관계를 통한 나'가 됩니다. 따라서, 일본의 게임들 속 '나'는 동료와 명백한 적을 구분한 상태로 그들과 관계를 주축으로 게임 속 세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인기 RPG 게임의 최신작 <제노 블레이드 크로니클즈 2>의 전투 장면을 한번 들여다보시죠. 게임의 진행 화면을 보면 (1) 동료와 나의 연계점 (2)적을 향한 공격 목표 (3) 전투와 관련된 모든 상태와 정보가 잘 알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습니다.
역시나 동료와의 관계와 적과의 입지 다툼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함 일본의 인기 RPG(역할 수행 게임) 게임들을 통해서도 이렇게 '관계성'은 도드라져 보입니다. 따라서, '나'와 '동료'와 게임 세계관 속의 관계 정립을 통해 내가 서 있는 곳 (立地)를 알고 순차적으로 입지를 넓혀가는 선형적 경험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게임 디자인 성향은 일본의 다른 장르 게임에서도 종종 드러납니다. RPG(역할 수행 게임)이지만, 정량화된 동료와의 관계치 형성을 위한 커뮤니티 활동이 중심이 되는 <페르소나> 시리즈를 거론할 수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일본이 만든 게임 장르인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의 대표작 <도키메키 메모리얼> 시리즈에서도 수치화되어 정량화한 '나'와 '동료'간의 관계 치를 통해 게임 속 '나의 입지'를 넓혀가는 선형적 디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를 토대로 바깥세상을 바라보던 서구권의 존재론적 철학사상에 비해 공자를 비롯한 동양철학 사상에서 늘 강조하던 '관계'의 미학에 대한 것이 문화적으로 뿌리를 내려있는 것처럼 비추어지기도 합니다.
서구권에서는 이런 일본의 게임 디자인 방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앞서 살펴본 대로 일본의 게임 속 주체인 '나'는 게임 디렉터의 의도에 따라가는 선형적 진행을 주로 경험하게 됩니다. 서구권의 개인인 '나'를 중심으로 자기 주도적 선택을 통해 진행하게 되는 비선형적 게임 구성과 대립되기도 합니다.
이런 대립점은 일본의 인기 RPG 게임 <파이널 판타지> 최신작이 발매된 2010년 서구권 매체와 게이머들에게 속칭 'JRPG는 선형적이고 지루하다'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아름답지만 지루한 게임 <파이널 판타지 13>라는 평가. 플레이어가 주도하는 선택에 따른 흥미로운 결과를 체험하는 역할 수행 게임의 재미 요소가 빠져있다는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한편으로, 서구권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의 인기 작품 <스플래툰 2> 개발에 참여한 Jordan Amaro 씨는 롤링스톤즈와의 인터뷰에서 '커피와 설탕'을 언급하며 일본의 정해진대로 즐기는 게임 디자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레스토랑에서 녹차와 함께 설탕을 주문하면 점원은 '녹차에 설탕을 넣지 않습니다. 저희 가게는 설탕을 취급하지 않습니다.'라고 거절하지만 녹차 대신 커피를 주문하면 함께 설탕을 가지고 왔다는 Ted Talk이야기를 참고로 일본의 게임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일본의 게임 디자인은 '이것은 당신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방법이 가장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느낌이 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의도된 재미가 <스플래툰 2>에서는 시간마다 일정하게 바뀌는 의도된 게임모드를 통해 구현되었다는 부연설명도 했습니다.
또한, 때때로 게임 디자인의 연구 포럼에서는 사랑을 목적으로 한 <위쳐 3>를 대표로 개인적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 시작되는 서구권 게임에 비해 소위 '왕도 RPG'로 불리며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과 싸우기 위한 용사의 모험을 그린 대다수의 일본식 게임 디자인을 비교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던 문화적 차이에 기인한 게임 디자인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고정된 관념으로 서구권과 일본 게임과 게임문화를 바라보지 않도록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2000년대 중반 처음 플레이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속 게임 세상은 개인적인 '나'를 중심으로 미지의 세상을 모험하는 기존에 접해보지 못한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앞서 설명한 일본의 게이머 문화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아직도 일본 현지화가 되지 않은 게임이기도 합니다. 애니메이션 세대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리얼한 그래픽은 차치하고서도 일본의 게이머들에게 익숙지 않은 게임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최근 게임을 즐기는 문화에 대해 서구권과 일본은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을까요? 흥미로운 지점들이 서구권과 일본을 교차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소위 MZ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이 문화 소비층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서구권과 일본 게임의 구분이 의미가 없습니다.
일본의 MZ세대를 들여다보면 앞서 얘기했던 '일본이 서양 게임을 싫어하는 이유'에서 거론된 서구권 게임의 대표적인 장르 오픈월드 및 FPS게임도 거리낌 없이 즐깁니다. 심지어 이들에게 문화현상이 될 정도로 인기가 있는 게임은 서구권 게임 장르 중 일본에 유행하기가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일인칭 슈팅게임 장르인 <황야 행동> (모바일)과 <에이펙스 레전드> (PC, 비디오 게임)입니다.
서구권의 MZ세대도 기성세대와 다릅니다. 디즈니 만화나 TV쇼를 보고 자라난 서구권 기성세대와 달리 이들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TV를 보고 자랐습니다. 추상적이며 작위적인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스토리와 캐릭터에 익숙한 세대가 바로 지금의 서구권 주요 소비층인 20-30대가 되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래프를 가져와봤습니다. 오른쪽 그래프는 지금의 20-30대 서구권 소비자층이 청소년기 때 접할 수 있었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배급 채널과 방송된 애니메이션 수입니다. 정말 어디에서든지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른쪽 순위는 모바일 게임 4월 최신 매출 순위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원작 또는 영향을 받은 게임이 세계 최대의 모바일 게임 시장인 북미에서 Top차트에 있는 모습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바로 MZ세대에게 익숙한 소재와 게임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이제는 게임 시장을 양분하는 일본과 서구권의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소비성향의 차이가 점차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남'과 '나'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일본의 문화에 침투하기 어려운 서로를 겨누는 총싸움, PK(Player Killing) 게임 <APEX LEGENDS>는 일본의 문화현상이 되었습니다. 2차 창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게임에 투영시키는데 익숙한 일본의 MZ세대에게 이 게임의 엔딩 없는 스토리 라인과 장르적 특성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문화적 현상의 이면에는 더 이상 사회가 만든 관계 속에서 얽매이지 않겠다는 개인주의적 관점이 젊은 층으로 중점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어가는 일본의 문화적인 변화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게임과 일상생활 모두 신경 써야만 했던 '나'는 이제 그런 것들은 관심 없으니 시끄럽다고 소리 지르는 내용의 다소 직설적인 느낌의 ADO의 메가 히트곡 <うっせっわ(시끄러워)>입니다.
무려 1.2억 회 재생될 정도로 일본의 10대 층을 비롯해 젊은 층에게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서구권의 개인주의가 점차 사회의 주류로 스며들고 있다는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또한, 이제는 서구권과 일본이 협업하여 게임을 만드는 글로벌 게임 개발 문화가 점차 확대되어가는 추세이다 보니, <메탈기어>로 유명한 일본의 크리에이터 히데오 코지마 씨의 신작 <데스 스트랜딩>은 스토리를 따라가는 선형적 디자인을 떠나 서구권에서 흔한 오픈월드 액션 게임으로 개발되었습니다.
고독한 여행자이자 일명 '택배맨'으로 활약하며 인간이 아닌 홀로그램과 소통하며 광야를 걷고 뛰다 보면, 어느새 이 세상에 '나'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이 존재할까라는 의문에 봉착합니다.
항상 '내가 어디에 서있고, 여기는 어딘지, 누구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했던 일본의 작금의 게임 디자인과 비교해보면 매우 다른 결임에 틀림없습니다.
화면 속의 '나'에 대한 서구권과 일본의 관점 차이를 들여다봤습니다. 크게 양분화해서 각자 서로의 문화적 차이에 따른 게임 디자인의 차이를 한번 살펴보면서 게임을 즐기는 세대의 변화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게임의 국경과 상관없이 '우리는 게임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그 안에서 일상을 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통해 체감한 것이 마음속에 남고 때로는 벅찬 감동이 되기도 하지요.
매일의 일상을 보내는 의연함과 치열함 역시 게임 속에 내가 경험하는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게임을 플레이한다' (게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To Be Continued.
2021년 4월 마지막 주 일요일
세가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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