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의 물건들을 뒤로하고.
한국에서 프랑스로. 2022년 2월. 큰 캐리어 2개와 작은 캐리어 1개. 배낭을 메고 왔다. 최소한의 짐만 꾸린다고 한 것이었는데도 수화물 무게가 초과되어 공항 발권 현장에서 거의 5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했었다. 덕분에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를 하긴 했지만. 그때 비행기를 타면서 생각했다.
"차라리 캐리어 하나를 덜고 저 50만 원으로 프랑스에 도착해서 필요한 물건을 사도 됐을 텐데"
내 캐리어엔 별의별 것이 다 들어 있었다. 브리타 필터부터 물병, 샤워기 필터 등등. 플라스틱 수납함과 크기별로 정렬한 손톱깎이. 불어책은 고작 몇 권. 6개월 살 것이라고 예상했던 만큼 겨울, 봄, 여름까지 커버할 수 있는 옷가지들을 압축팩에 넣고 최대한 밟았었다. 혹시 그림을 그릴까 봐 색연필과 오일파스텔, 수채화 도구까지 챙겨 왔었다. 2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열어보지도 않은 도구들은 한국 본가에 놔둬도 되었을 것을. 타국에서 심심할까 염려하는 불안함과, 혹은 못다 한 예술혼이 갑자기 점화되어 폭발하듯 터질까 봐 하는 실낱의 기대가 뒤섞여 짐이 겹겹이 쌓이고 또 쌓였다.
한국에서 프랑스로 왔다고 하지만 온전한 이사는 아니었다. 당시 서울에 자취하던 방도 그대로 놔두고 왔었고 20년 넘게 살던 일산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 본가에도 내 몫의 방이 하나 있었으니까. 내 짐은 곳곳에 산발적으로 흩어졌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을 옮길 때마다 필요한 물건이 없는 경우가 생기고, 있어도 어디에 뒀는지 모르는 경우가 생겼다. 무질서의 혼란. 나를 닮은 모양새의 방 안에 놓인 내 물건들은 주인 없이 6개월, 아니 10개월이 방치됐다. 계획했던 기한을 조금 넘어서 10개월쯤 접어들었을 때 한국에 들어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서울 자취방을 정리했다. 그때 내 물건의 80프로 이상을 남에게 넘겼다. 하나도 홀가분하지 않았다. 물건이 하나 둘 떠나갈 때마다 내 안에 돌덩이가 하나 둘 얹어졌다. 이별의 부채감이 견디기가 어려워 내가 선택한 비겁했던 방법은 다시 공간을 옮기는 거였다. 본가에서 잠시 머물면서 서울 자취방을 기억 속에서 삭제했다. 그에 관련된 것들도 전부.
다시 한국에서 프랑스로. 빈 상태로 들고 갔던 캐리어 안에 물건들을 꽉 채워서 왔다. 한살림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들, 엄마의 정성과 염려를 가득 반영한 그것들이 캐리어를 가득 채웠다. 한국어로 된 책들 몇 권을 더 넣고. 옷을 더 추가했다. 이 과정을 이후에 한 번 더 겪었으니 총 3번 한국- 프랑스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리고 엄마가 프랑스에 왔다간 날까지 더해서, 총 4번의 왕복 비행의 끝자리엔 내가 며칠 전에 마주해야 했던 무수한 물건들의 파도가 놓여있었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11월 중순에 한 번, 그리고 내일 다시. 11월의 어느 날 밤에 큰 캐리어 1개와 작은 캐리어 2개를 꺼내 가능한 최소한의 짐을, 이걸로 6개월은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쌌는데 그게 어찌도 무겁던지. 그 과정에서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물건들에 내가 어찌나 소스라치게 놀랐던지. 이걸 다 지고 나른 게 인간 택배 그 자체였다는 나라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럽던지. 아마 이때부터 시작됐을 거다. 물건에 대한 공포감이.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지만 결국에 터져버린. 동네, 도시를 넘어서 국가를 바꿔도 변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의 24시간을 따라다니는 물건들이, 전부 내가 고르고 선택했기에 더 책임감이 느껴지는 그 물체들과 멀거니 마주하고 앉아 생각했다. 이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대야 하는 건가, 하고.
11월 중순에 런던에 갔을 때, 손에 3개의 캐리어와 백팩을 들은 모양새가 한국에서 프랑스로 넘어올 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호텔 하는 척하는 호스텔에서 3주 간 지내면서 나는 작은 캐리어 하나만 사용했다. 나머지 캐리어는 지하 라커룸에 넣어놓은 채로. 들고 다니기 무겁다는 것도 이유였으나 캐리어를 열면 쏟아지는 물건들을 놓을 공간 하나 없는 18인실 호스텔에서 괜한 공포감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 정신없이 여러 일들을 처리하고 다시 제대로 각 잡고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가져갔던 캐리어는 그대로 가지고 돌아왔다.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쪽팔린 기분은 뭘까? 창피함? 좌절감? 나는 아직 감정 언어와 친하지 않아서 정확히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당시 그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거대한 거울을 마주하고 커다란 부끄러움에 꺾인 고개를 깊이 숙였다.
크리스마스가 꼈던 연말은 더욱 바빴고 부산스러웠다. 결과적으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짐을 줄이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새 짐을이 방 한편에 차곡차곡 쌓였다. 선물을 받고 우는 사람은 있겠지만 나와 같은 이유로 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절망이었다. 그리고 공포. 아, 안 그래도 많은 물건들. 또 쌓였다. 또 생겼다. 그렇다고 헌 것을 버릴 수도 없고 무엇이 헌 것인지도 모르겠고 새것을 얼마나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여러 생각이 겹쳤는데 다행히 시간이 해결해 줬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인데,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집을 비워야 하는 데드라인이 임박해졌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서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이삿짐을 싸면서 생각했다. 차라리 완전한 이사라면 덜 힘들겠다고. 6개월만 런던에서 살고 파리 이 집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기에, 필요한 짐을 또 선별해야만 했다. 전부 가져갈 수는 없으니. 캐리어로 다 옮길 수도 없을뿐더러, 택배를 부쳐도 값이 꽤 나갔다. 선별작업, 이게 진짜 괴로운 부분이었다. 가치를 매겨야 하는데 그 판단이 온전히 나에게 달려있다. 물건을 꼼꼼히 살피고 그 물건과 나의 관계를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상상을 해야 했다. 미래에 어떻게 사용할지. 그러려면 과거를 돌이켜야 했다. 회상을 했다. 과거에 어떻게 활용했는지. 과거의 공백이 느껴지는 물건들을 볼 때,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모양을 한 것들이 생각지도 못한 서랍 한 구석에서 나올 때, 분노도 울컥거리면서 눈물처럼 흐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까지나 싫은 소리, 죽는소리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성격이 못 되고 그런 모습을 하는 나를 굉장히 경멸한다. 오 꽤 센 표현이 나도 모르게 써진 걸 보니까 진짜 못마땅한가 보다. 그래서 열심히 물건들을 직시했다. 닦고 닦았다. 그리고 한 물건, 한 물건에 약간의 시간을 할애했다. 관계성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유용한가 아니면 무용한가. 고민하고 결과에 따라 캐리어에 아니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거실 정리만 마쳤을 뿐인데 캐리어는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캐리어 안을 다시 뒤졌다. 분류했다. 런던에 간다면, 안 가더라도 여기 오늘, 당장 내일 사용할 물건인가? 내게 필요한가? 했을 때 완전히 예스! 를 외치는 물건과 아마도..? 를 뱉는 물건이 있었다. 그 아마도. 아마도의 물건에서 주저하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끌려왔던 거다. 공포는 아마도에서 시작됐을 거다.라고 정리하면서 나를 일단 안심시키고 물건도 다독였다. 그리고 빈 상자에 담아 지하 창고에 넣었다.
기존과 다르게 이번의 국경 넘기는 2인분의 몫으로, 캐리어도 두 배, 택배 상자도 두 배였다. 엄청나게 많아 보였다. 와, 선별 작업을 거쳤는데도 이 정도란 말이야? 나는 이번 생에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는 글렀다!라는 패배감이 살짝 일었으나, 이성을 되찾고 계산을 했다. 내 캐리어는 큰 거 1개 , 작은 거 1개. 택배 상자는 2개. 그 택배 상자 2개는 큰 캐리어 1개의 부피. 그러니까 언제나 그렇듯이 비슷하게 2개의 큰 캐리어와 1개의 작은 캐리어 몫을 들고 떠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적으면 좋았으련만 하는 아쉬움은 들었지만. 어찌 첫 술에 배부르랴. 그간 오랫동안 물건과 나 사이 놓여있던 공터의 모래갈이를 했다는 것으로 의의를 두고 기쁨을 살짝 맛본다.
내가 남을 대하는 만큼 내가 나를 귀하게 대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오늘 아침. 집안 대청소를 하면서, 나 대신 이 집에서 몇 달을 살 사람을 들이는 만큼 최대한 정돈된 집을 맡기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침대를 박차고 나가 냅다 청소에 돌입했다. 이 작은 8평짜리 원룸이 거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정말 평소에 전혀 눈길도 주지 않던 온갖 구석구석을 누볐다. 먼지를 걷어냈다. 기침이 연신 튀어나왔다. 이러니 이 집에서 폐병 안 걸리고 배기겠어. 미친 듯이 닦았다. 그리고 가구배치도 바꿨다. 평소에 , 이 집에서 살면서 계속 도전하고 싶었던 구조였다. 근데 물건들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물건들이 다 빠지고 나니 가구들이 가벼워져 혼자서도 요리조리 옮길 수가 있었다. 옮겼다. 그러니까 내 집이, 내가 바라던 모습의 구색을 갖췄다. 이리저리 가구들을 배치했다. 이 자리에 놓으면 좋을 물건이 뭐가 있을까? 했을 때 조금만 시간을 들이니 곧잘 마땅한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 꽤 달았다. 컨트롤하는 느낌. 이거를 원하는 거였나? 생각했다. 여하튼 집이 꽤 예뻐졌다. 이사를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기 더 머물면 좋겠다고. 내 맘에 드는 모습을 한 깨끗하고 비어진 이 집에서 편안히 쉬고 공부하고 먹고 생각하고 자고 싶었다. 아쉬움은 곧 설렘으로 바뀌었다. 6개월 후에 집에 돌아올 때, 적어도 기대감으로 현관문을 열 수 있겠다고.
역마살이 낀 인생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들었다. 딱지가 앉았다. 너무 들어서 그 단어가 들리기만 해도 골이 울린다. 좋은 점이 많은 살이라고 생각해서 만족하기도 했었다. 어딘가로 떠도는 일은 자유로웠고 재미있었고 신났다. 그건 가능성과 동의어로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 택배 수거하는 사람에게 내 택배 상자들을 건네면서, 이름을 확인하고 물건의 종류를 확인하면서, 나와 함께 들고 가는 가뿐한 여행 가방이 아닌 내 영역을 벗어나 도저히 안 되기에 남에게 맡기는 짐들을 며칠 후에 받아보기 위해 먼저 집에서 떠나보내면서, 역마살이 마냥 매력적인 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벼이 떠날 수 있는 여행과 다른 모습. 여행은 즐겁지만 이사는 괴롭다. 공포다. 터전을 옮기는 것은 둘째치고 기존 터전에서 함께해 온 것들을 정리하는 과정은 잔인하다. 수확물들에 가치를 매기는 것도 서글프다. 이사를 자주 다니는 것이 운명이라면, 그 운명이 더는 지나치게 버겁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감당 가능한 정도로 그 나를 압도하는 크기의 바위를 쪼개고 쪼개서 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는 돌멩이로 만들어 내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
내일 이 맘 때는 아직 이불도 도착하지 않은 낯선 땅의 낯선 집의 낯선 침대 위에 누워서 있을 테다. 내일의 내가 안정된 마음으로 기쁘게 새해에 새 터전에서의 새날들을 마주하기를 빈다. 잠이 안 오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