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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랑 Jan 17. 2019

좋아한다. 에서 끝나는 마음


오랜만에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함께 콘서트에 가자며. 다른 약속과 겹치기도 하고, 그 정도의 돈을 쓰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고 싶지도 않아 정중히 거절했다.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하면 별로 서운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못 한 답이 돌아왔다.


“너 예전에 나한테 빚진 거 있잖아. 그거 생각해서라도 같이 가주면 안 돼?”


그러니까, 지난 날 내가 함께하기로 해놓고 여러가지 이유로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 혹은 그녀가 자발적으로 베풀었던 호의를 생각해서라도 같이 가 달라는 거다.


툭.

순간 마음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하는 마음, 좋아서 한 일은 왜 거기서 끝날 수 없는 걸까, 하고 슬퍼졌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늘 그랬다. 내가 원해서 친구들을 잔뜩 초대해 요리를 해주고도 그 수고를 몰라주면 서운했다. 또 기꺼운 마음으로 밥을 사주고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는 후배를 보면 왠지 얄미웠다.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픈 남자친구를 위해 스스로 두 손 걷고 장을 봐 와 죽도 만들어주고 종일 간호한 거면서, 내가 같은 처지에 처했을 때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망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좋아서, 좋은 만큼 열과 성을 다했을 뿐인데 결국은 그 마음이 상처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분명 내가 받은 상처만큼 상대는 꼭 같은 무게로 부담을 느꼈겠지, 끝끝내 못 가게 되어 미안하다는 나의 말을 마지막으로 더는 답이 없는 카톡을 보며 생각했다.



반대로 감동으로 울컥했던 순간엔 늘 순수한 호의가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떠난 휴가 때도 그랬다. 당시 수도인 콜롬보에 10개월 동안 인턴으로 나가 있었는데, 게으름을 피우다 집 갈 날이 한 달 남짓 남았을 때까지도 콜롬보 밖을 못 벗어났다. 관광 정보로 따지면 2박 3일 동안 잠깐 왔다 가는 여행객보다도 스리랑카를 모르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10개월이나 있었는데 유명 관광지는 보고 가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 급히 휴가를 내고 숙제처럼 여행을 시작했다. 당연히 차편을 미리 예매하는 부지런함은 없었다. 결국 게으름뱅이에게 주어진 건 여행 내내 서서 이동하는 벌 아닌 벌. 그래도 여행지 간의 이동 거리는 한 시간 남짓이라 서울의 출퇴근 지옥철을 생각하면 못 견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였다. 보통 콜롬보로 가는 로컬 버스는 한 시간에도 여러 대가 수시로 지나다니기 때문에 자리가 없는 일이 없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자리가 없었다. 다음 버스엔 있겠지, 생각하며 한 시간 동안 5대의 버스를 보냈다. 그랬는데도 도통 빈 버스가 올 기미가 안 보였다. 결국엔 포기하고 다가오는 버스에 무작정 올랐다. 이번에도 자리는 없었다. 게다가 서서 가는 사람도 많아 발과 발은 마구 뒤엉켰다. 그렇게 자세 한 번 못 바꾼 채 두 시간을 서 있다 보니 슬슬 다리에 감각이 없어졌다.


그때, 앞에 앉아 있던 한 스리랑카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앉아”


몇 번이고 사양했는데도 자기는 괜찮으니 앉으란다.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사람 왜 이러는 거지?’ 하는 생각이 따라왔다. 5시간을 더 가야 하는데 순수하게 자리를 양보하는 거라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친절이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기에 감사는 의심을 동반하곤 했다. ‘설마 자리 양보한 거로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외국인 여자 한 번 만나보려고 수작 부리는 건가?’ 등의 생각이 얽힌 복잡한 머리로 청년을 올려봤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묵묵히 내 앞에 서 있었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어느 나라에서 왔어?”, “스리랑카에선 뭐해?” 등 외국인을 만나면 꼭 하는 그 흔한 질문도 일절 없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그저 순수한 호의로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그 청년이 고마워지면서 마음이 일렁였다. 때론, ‘그냥’이 무성의함이 아니라 온전함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태국에서 여행 중 한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봤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냥 길만 알려주면 되는데 직접 내가 타야 하는 버스를 같이 타서, 내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서 같이 내리더니 저쪽으로 가라고 알려주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버스에 올라타던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봤을 때. 또, 모로코 여행 중 기차 옆자리에 앉은 현지인이 어두운 밤길에 숙소를 찾아 돌아다닐 날 걱정하며 자기가 아는 숙소를 소개해주고 기차역까지 마중 나올 택시를 구해 주었을 때도 그랬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기어코 해주는 그 수고스러움이 고마웠다. 누가 봐도 가난한 행색의 배낭여행자니 도와줘 봐야 금전적인 이득을 볼 일도 없을 텐데, 게다가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니니 본인의 이미지나 평판 관리를 위해서 한 일도 아닐 텐데, 그런 생각들이 밤새 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선의, 호의란 그런 게 아닐까?


그저 좋아서 하는 것.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는 것. ‘좋아한다’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 그게 연인이든 친구든, 누군가를 좋아할 때 필요한 마음가짐인 것 같다. 하지만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누군가가 좋아지면 자꾸만 기대를 그 마음에 편승시킨다. 그러곤 또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알면서도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다짐해본다. 좋아한다. 에서 끝나는 마음을 끝내는 갖고야 말자고.



- 사람으로 가득했던 스리랑카의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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