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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랑 Jan 17. 2019

애초에 완벽함 같은 건 없으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의 난 다음 날 학교에 메고 갈 책가방이 제대로 꾸려져 있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아이였다. 자기 전 몇 번이고 알림장과 준비물을 번갈아 확인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일터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해 내일 챙겨가야 할 준비물을 알렸다. 하루도 빼먹을 수 없는 중요한 일과였다. 한 번은 엄마가 퇴근길에 준비물 사오는 걸 깜박했다고 세상이 무너진 듯 울고불고 난리를 친 적도 있다. 결국 엄마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그 길로 다시 나가 준비물을 사 왔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이다)


변명하자면 그땐 준비와 노력으로 안 되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열한 살 어린 소녀에게 세계란 그런 단순한 것이었다. 해야 하는 숙제를 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들만 준비하면 딱 맞게 맞춰진 레일 위를 매끄럽게 흘러가는 장난감 기차 같이. 일도, 사랑도, 인간관계도 모두 노력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러니 세계에 소속되기는 쉬워 보였고, 그런 까닭에 더 완벽함에 집착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 다니다가 때가 되면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그런 것들이 당시의 나에겐 완벽함이었다. 노력하면 이루어지리라 기대한 것들.



그런 완벽함은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뒷배경처럼 천천히 무너졌고, 여행지에선 눈앞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홀로 떠난 인도 여행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무엇을 계획하든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었던 게.


인도에선 기차를 예약하면 기본적으로 2~3시간 정도가 연착됐다. 게다가 이미 늦게 출발한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 가면서 점점 더 약속한 시각과 멀어졌다. 목적지에 다다랐을 땐 예정된 시간보다 10시간도 훌쩍 더 늦어져 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애초에 밤늦게 도착하면 위험하니까 아침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야지, 같은 계획은 쓸모가 없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론 아침에 도착하기도, 한밤중에 도착하기도, 야속하게 별들만 잘 보이는 깜깜한 새벽에 도착하기도 했다.


처음엔 화가 났다. 기차 연착 하나 때문에 공들여 세운 여행 계획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게 쉽게 용납이 안 됐다. 한국산 우물 23년 차 개구리인 나에게 그런 일은 경험해 본 적도, 그렇기에 예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역장이라도 불러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기차는 늦게 왔고 여행 계획은 이미 무너진 도미노와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체념하고 다시 도미노 조각들을 세우는 일뿐이었다


한편 일상에서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체념을 배우는 일이 잦아졌다.


대학은 어떻게 노력해서 원하는 학교, 학과에 진학했지만 취업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혼자 여행도 다니고, 그러다 인도에서 옷을 떼어와 홍대에서 팔아 보기도 했다. 교환학생, 창업 등 20대에 해보자 마음먹었던 것들을 충실히 하며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았다. 하지만 내 삶은 자기소개서라는 도마 위에만 올라가면 부정당하기 일쑤였다. 그제야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 남들처럼 토익 점수를 높이고 자격증을 따고 그런 일들로 몇 년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와 과거를 새로 쓸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건 체념뿐이었다. 선택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건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어딘가엔 나를 필요로 하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연애를 하면서도 그랬다. 처음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난 연애에서는 너무 받기만 하다가 나중에 후회했으니 이번 연애에서는 되도록 많이 주어야지, 이런 다짐도 해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못 해준 사람은 못 해줘서 떠나고, 잘해준 사람은 잘 해줘서 떠났다. 어차피 떠날 사람은 결국 떠나고야 말았다.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울었던 밤도 셀 수 없었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데 그렇다고 쉽게 포기가 되지도 않았다. 그러다 체념하게 됐다. 사람 마음은 노력으로 안 되는 거라고. 한참이 걸리긴 했지만….


그렇게 20대를 보내면서 알게 됐다. 그냥 세상에는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아무리 노력하고 준비해도 소용없는 일이 있다는 걸. 때로는 아직 때가 아니라서 안되고, 때로는 나에게 주어질 운명이 아니라서 안되고, 때로는 다른 더 좋은 게 기다리고 있기에 안 되고, 그냥 그런 일들이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불완전함으로 이루어진 저마다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30살이 넘은 내게 세계는 더 이상 만만하지도, 쉽지도 않다. 하지만 남들이 사는 것처럼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게 완벽함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애초에 완벽함 따윈 없으니까 그냥 나답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그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가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때는 아래의 기도문을 읽으며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해본다.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 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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