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umiLuna Feb 07. 2022

겸손의 미덕이 뒤통수 칠 때 Part 1

마흔 넘어 외국 직장에서 서바이벌 하기 

나는 그나마 아주 운이 좋은 경우라 생각한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제조업 영업교육팀에서 뜨거운 맛을 보며 직장생활을 시작하긴 하였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외국계 컨설팅 기업으로 이직한 후 쭉 소위 외국계 회사들을 다녔으니 적어도 미국이나 서유럽 회사의 시스템이나 문화는 익숙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영어 과목을 좋아했어서 다른 과목에 비해 영어는 자신이 있었고,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면서 외국에 있는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영어로 하게 되니 비즈니스 영어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게다가 남편과의 오랜 롱디 연애 기간 그리고 이제 거의 이십 년이 가까워지는 결혼 생활로 어느 정도 문화 차이에 대한 인식이나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은 갖고 있다고 자부했다. 서론이 이렇게 길어진 까닭은 이렇게 자신만만했던 내가 이곳 핀란드에 와서 쭈구리(^^)로 살게 된 이야기를 풀기 위함이다. 


언젠가 아이들이 완전히 다 크기 전에 핀란드에서도 살아볼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개발자도 아니고 특별한 기술이 있지도 않은, 믿을 거라곤 20년 숙성된 경력밖에 없는 내가 핀란드에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은 회사 지사 간 내부 이동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객관적 시각으로 20년 경력이 있다고 해도 한국말을 할 줄 모르고 한국에서 기본적인 배경(학력, 경력 등)이 없는 태국 사람을 한국 회사에서 경력만 믿고 과연 뽑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 고용률 95%를 자랑하는 북유럽에서 남은 인생을 경제적 독립성 없이 남편에게 의존하고 싶지는 않았고, 돈이야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거라 하지만 아이 셋을 책임져야 하기에 나도 벌지 않으면 매우 쪼들리는 생활을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절대 핀란드 가서 살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 전쟁을 겪었던 할머니는 외국에서 온 군인들을 따라갔다가 팽 당하는 여자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행여 나도 버림받을까 봐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착하고 성실한 우리 남편의 의문의 1패다.)

이러저러한 계산 끝에 한국에서 마지막 회사로 이직할 때에는 글로벌 회사이고,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 확장해서 일할 수 있는 직무를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전에 같이 일했던 분으로부터 딱 이 조건에 맞는 자리를 소개받아 지원할 수가 있었다. APAC(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8개 나라를 부분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신설된 자리였는데, 이 자리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기회를 주게 된 소중한 자리였다.      


그리고 2년 후, 앞 글에서 설명한 대로 이민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당시 매니저에게 앞으로 6개월 정도는 더 일하고 나도 핀란드로 가려고 한다는 계획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당시 매니저는 그때까지 자리를 알아보자며 자리가 없는 경우에도 핀란드와 계약 후 APAC Timezone으로 일하면서 알아보자는 엄청난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글로벌 콘퍼런스가 있을 때 핀란드가 속한 Western Europe 쪽 매니저와 짧게 미팅을 잡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었고, 중간에 가족들을 방문하려고 핀란드에 왔을 때에는 핀란드 팀에서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분에게 무작정 메일을 보내 사무실 보러 가도 될까라는 요청을 했고 그것이 성사돼서 핀란드에서 일하는 몇몇의 동료와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서 적극적으로 들이댔는지 모르겠다.)       

APAC Timezone에 맞춰 일하느라 이곳 새벽 3시에 일어나 근무하기 시작해서 오후 1시경 마치고 비몽사몽간에 저녁 8시쯤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3개월쯤 했을 무렵, 이전에 사무실 구경을 빙자하여 만났던 핀란드 동료가 자기 그만 둘 거라며 자기 자리에 지원해 보라는 귀띔을 해 주었다.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었던 것인지, 지원한 자리에 인터뷰를 2차 하고 (물론 이전 매니저가 잘 포장을 해서 피드백을 준 것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전에 2년 반 동안 열심히 일해서 좋은 성과를 냈던 것도) 크리스마스 선물로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진정한 고난은 공식적으로 이 팀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APAC 팀은 총 4명 서로 sister, brother라고 부르는 매우 친밀한 관계였고, 우리 팀뿐 아니라 APAC 팀 전체가 직접 만날 기회가 많았던 터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그중 한 명은 우리 집에서 자고 며칠간 더 있을 정도로 친했다). 회사에서 다른 나라에 있는 동료들과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구나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WE(Western Europe) 팀에는 총 11명의 동료가 있는데, 팀 미팅에 들어갔을 때에도 친밀함보다는 왠지 거리가 있는 썰렁하고 공식적인 사이 같은 느낌이 들었고 농담을 했을 때에도 별 반응 없는 예의 바르고 친절한 사람들 같았다.  


다음 글에서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