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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피터 Sep 07. 2022

파괴놀이

아트 테라피, 습자지 찢는 모임에 다녀온 후기

아무 목적 없이 습자지 찢는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이 모임이 끌렸던 것은 고질적 의미 과잉의 상태인 요즘, 무無목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시간이 절실했기 때문인 것 같다.


밝은 호스트님의 환대와 안내와 함께 모임이 시작됐다. 첫걸음은 감정카드로 지금의 나를 살펴보고 마주하는 시간. 테이블에 하나하나 펼쳐지는 수많은 감정들을 보며 인간의 내면이 ‘이렇게 복잡 다양 하구나’를 다시 한번 알게 된다. 오늘의 내 마음은 어떠한 상태일까? 고민하며 점괘를 뽑듯이 신중하게, 모든 게 처음이어서 느껴지는 낯섦과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는 어떤 설렘을 표현하는 카드를 내 앞으로 슥 가져왔다. 각자가 뽑은 카드를 보여주며 ‘숨겨왔던 나의 소중한’ 마음들을 소개하다 보니, 어느새 어색한 기류는 사라졌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감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본격적으로 습자지를 찢기 위해 바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호스트님이 거의 1,000장에 가까운 종이 뭉텅이를 둘러앉은 바닥 빈 곳에 툭 내려놓으셨다. ‘자 이제 가로로 세로로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색의 습자지를 잘게 모두 찢으세요!’ 역시 이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무엇에 좋은지 말해주지 않았다. 일단 그저 해보라는 것. 처음에는 다들 한 줄 한 줄 색과 간격을 맞춰가며 소중하게 찢어나갔다. 모임에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도 도란도란 나누면서. 그런데 시간이 계속 흐르자 손에 잡히는 데로 몇 장씩 한 번에 쭉쭉 쫙쫙 행위의 결과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습자지를 찢는 경지에 모두 오르게 됐다. 우리의 대화도 어떤 내용이 담긴 것이라기보다는 ‘좋다’, ‘재밌다’, ‘신기하다’ 등 순간순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순한 언어로 바뀌었다.   


습자지와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상태가 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종이를 찢다 보니, 어느새 우리 앞에는 습자지 조각들이 쌓이고 쌓여 마치 종이 파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과 같은 형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 스텝으로 호스트님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함께 그 파편 속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가려질 정도로 쌓인 습자지 조각들 속에 파묻힌 나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엄청난 파괴의 에너지가 분출된 이후 차갑고 딱딱하게 굳고 마는 용암처럼 나도 그렇게 서서히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느낌이 전혀 두렵거나 낯설지가 않다. 오히려 편안하고 따뜻하다. 그렇게 나는 파괴의 놀이 이후 찾아온 일종의 ‘죽음’을 수용했다.



그렇게 완전히 잠에 들려는 순간, ‘자 한분씩 가운데 원안에 들어오셔서 앉아주세요.’ 호스트님이 우리를 부른다. 누군가로부터 정말 듣고 싶은 말 하나씩 생각하고 알려 달라는 요청과 함께. 나는 어떤 말이 듣고 싶을까. 오래전부터 세계의 의미, 삶의 의미, 인간의 의미, 존재의 의미… 수많은 의미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품고 있는 스스로를 생각해 봤다. 나는 왜 이토록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닌 뜬구름 같은 ‘의미’를 갈구하는가. 어쩌면 나는 그동안 스스로를 무無가치 하다 여겨 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 그 삶에 대한 의미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외부에서 그것을 찾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함께 모임에 참여한 분들에게 나의 가치 있음, 내 삶이 사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달라 요청했다. 


우리가 손수 파괴한 습자지의 파편들 한 덩어리를 각자 양손에 집고서는 내 몸과 머리에 뿌리며 그들이 이야기해준다. 내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존재라고. 따뜻하고 뭉클하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그 순간 나는 기독교 전통에서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오는 세례의식을 떠올렸다. 파괴와 죽음 이후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은 시퀀스.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우리는 놀이와도 같은 세례의식을 서로에게 해주었다. 당신은 소중하다고,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잘 태어났다고, 잘하고 있다 말해주며.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저기 흩어지고 쌓여있는 습자지 파편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박스 테이프로 돌돌돌 말아 공처럼 만들기도 하고, 마치 원시부족의 굿판처럼 공간 곳곳을 가로지르는 갖가지 색으로 연결된 띠를 만들어 공간 곳곳에 붙이기도 했다. 마음에서 떠오르는 대로 그저 자유롭고 즉흥적인 이 ‘다시-모음’의 과정에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다양한 감정들이 천천히 흘러나옴을 경험했다.    


어린아이처럼 습자지를 찢고 던지고 또 붙이고 연결하는 ‘모임’을 함께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두근거렸다. 창문에 비친 나는 이전과 다를 것 없는 여전한 나였지만, 왠지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것 같은. 그래서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인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목적이 없는 모임이었지만, 분명 이 모임은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힌두교의 시바신은 대표적인 파괴의 신이다. 춤의 제왕으로도 불리는 시바는 우주가 파괴되어야만 할 때 탄타브라 불리는 파괴의 춤을 춘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시바는 오래된 옛-세계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 파괴의 현장에서 다시 새로운 땅과 하늘의 창조가 시작된다.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새로워 지기 위한 시바의 춤을 춘 것일지도 모르겠다. 


즐거운 파괴의 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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