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피터 Dec 25. 2023

어둠 속에서 별은 태어난다

크리스마스와 동짓날이 전한는 위로

겨울이 왔다. 아니 이미 와 있었다. 24절기 중 ‘겨울의 시작’을 뜻하는 ‘입동’이 11월 8일이었으니, 절기상으로는 지난달부터 이미 겨울의 계절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 계절의 차가운 공기와 바람은 우리 몸을 바짝 움츠러들게 만든다. 몸이 이렇게 긴장하니 마음에도 덩달아 날이 서고, 그러다 보면 다소 방어적으로 되어 여유마저 부족해지기 쉽다. 몸과 마음이 총체적인 긴장 상태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이번 겨울이 유독 혹독하게 느껴진다. 지난여름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빙하가 많이 녹았다고 하던데. 물론 이런 기후변화에 의한 기온 하강 현상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의 여러 복잡한 문제들도 이 추위에 한몫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추위와 무슨 상관이 있겠냐마는…. 우리는 종종 외부의 특정 현상에 대해 실체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 괴롭다고 자주 착각하고는 한다.


이맘때쯤이면 습관처럼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와 같은 명확한 해답이 없는 질문들 말이다. 작년 겨울이 특히 그랬다. 한 해의 끝에 서서 그간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지 되돌아보다가, 모래처럼 모두 빠져나가 내 두 손에는 남겨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불편한 생각에 휩싸였다.  


2013년 봄,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린 마포구 아현동으로 친구들과 이주한 후 이것저것 많은 것을 했다. 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청년 마을을 만들어보겠다며 커뮤니티 활동도 했다. 무슨 오지랖이었는지 동네에 공실로 방치된 월셋집을 찾아 사람들을 연결하고, 이즈음 사회적기업을 창업해 보겠다며 도전한 기억도 난다. 


2016년 여름, 아파트 재건축이 추진되어 활동하며 살던 동네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이후에는 현타가 온 것인지 아니면 집 나간 현실감각이 돌아왔는지 비영리단체에 취직해 2년간 일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2018년 가을, 역시 회사는 나와 맞지 않는다며 돌연 퇴사하고서는 끊임없이 방황하는 내 삶이 하도 답답해 그때부터 사주·명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여 년 동안 무수히 많은 활동을 했지만, 사실 그 무엇 하나 ‘전문적’인 일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어 종종 마음이 헛헛했다.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했지만 주로 파트타임이다 보니 돈을 많이 벌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공부와 연구에 전적으로 매진하고 있지도 않은 뭔가 애매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또 겨울이면 늘 찾아오는 이런 우울한 마음들이 어쩌면 팔자 좋은 소리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수천 명이 죽어 나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지역에서 살고 있었다면…. 


뇌과학은 인간의 모든 감각은 심리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쾌감이나 통증, 좋고 나쁜 감정들 모두 뇌가 만들어 내는 환각이라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모두 환각에 휘둘리는 존재로 태어났고, 인간의 삶은 대부분 영화 매트릭스와 같이 착각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먼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도 결국 인간의 모든 고통은 무명(無明, avijja)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빛이 가려진, 어두워진, 그래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부처가 아니고, 괴로운 것은 괴로울 뿐이고, 겨울은 여전히 춥게 느껴지는 것을….


그나저나 곧 다가올 12월 22일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은 가장 짧다는 동짓날이다. 동지는 24절기 중 22번째 절기로 매년 조금씩 다르지만 주로 양력 12월 21일~22일이 된다. 태양의 황경이 270° 위치에 있어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고, 극지방에 가까울수록 종일 해가 뜨지 않는 극야현상이 함께 일어난다. 


그렇게 빛의 힘이 가장 약해진 밤중의 밤, 깊은 어둠이 온 세계를 뒤덮는 이 날 전통적으로 우리는 예로 부터  붉은 팥으로 죽을 만들어 먹었다. 팥의 붉은색을 음양 중 따뜻하고 길한 양(陽)의 색(色)으로 여겨, 차갑고 어둡고 흉한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한다. 옛사람들은 따뜻하고 생명이 태어나 자라나는 봄과 여름을 양(陽)으로, 반대로 춥고 생명이 노쇠해 흙 속으로 돌아가는 가을과 겨울을 음(陰)으로 여겨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양(陽)이라는 말에는 기쁘고 즐거운 것, 반대로 음(陰)에는 슬프고 아프고 두려운 것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들이 결합되었다.


그러면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동지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날로만 인식되었을까? 사실 동지는 일종의 변곡점이다. 어둠에 온전히 잠식되는 것이 아닌, 음(陰) 속에서 다시 밝은 하나의 양(陽)이 생겨나는 변화의 지점. 동지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극에 다다르면 결국 쇠퇴하고야 마는, 새로운 변화가 늘 찾아온다는 이치를 담고 있다.


동지 풍습은 동아시아 문명권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문화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마스다. 오늘날 예수님의 탄생일로 알려진 12월 25일은 원래 고대 로마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전까지는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 기념일이었다. 이날을 태양신의 탄생일로 정한 것 또한 고대 로마력에서 12월 25일이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였기 때문이다. 


해가 가장 짧은 동짓날을 기점으로 점차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 혹은 태어난 날로 생각하여 오히려 축제를 벌이며 기념했다. 인류는 언제나 가장 깊은 어둠과 고통의 순간에서, 고통을 고통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늘 새로운 빛과 희망을 보고 노래했다. 이것은 일종의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이지 않을까 싶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결국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 그러니 삶은 정말 마음먹기에 달린 것일지 모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불교 경전 중 <화엄경>의 핵심 사상을 이루는 말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뜻. 삼국시대 중기 신라에서 활동한 승려 원효도 어두운 동굴 속에서 시원하게 마셨던 물이 다음 날 아침 해골 물이었음을 보고 구역질을 하다가 모든 것은 결국 마음이 만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얼마 전 동네 공원길을 걷다가 뜬금없이 페퍼톤스의 오래된 노래 <New Hippie Generation>이 생각났다. 


   하루쯤 쉬어도 괜찮지

   오늘 당장 모든 게 변하진 않을 테니 

   세상은 넓고 노래는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인생은 길고 날씨 참 좋구나


MBTI가 ‘T’여서 원래 잘 울지 않는 편인데, 노래를 듣다가 코끝이 찡해졌다. 천천히 걸으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고,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봤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고, 이곳저곳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봤을 뿐인데. 그런데 세상이 정말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툭 하고 던져졌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나는 왜 늘 삶의 이유는 뭔지, 우주는 왜 존재하는지, 사회는 왜 이리 혼탁한지…. 끝도 없이 고민하며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고 있을까, 그런 후회가 들었다. 아마 그 순간이 나에게는 어떤 변곡점이었던 것 같다.


페퍼톤스 버전을 들어보셨다면, 임금비의 리메이크 버전도 꼭 들어보시길 바란다. 피아노 연주 중심으로 편곡했는데 이 겨울에 참 잘 어울린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연초에 계획했던 것들 중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다며 낙심하고 있지는 않을지. 되는 일 하나 없이 되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해지지는 않았을지.


음(陰)의 에너지가 극에 다다른 한겨울의 동짓날, 인류는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대신 오히려 다시 뜰 태양(太陽)을 기다리며 축제를 열었다. 우리나라 국기에도 새겨진 음양(陰陽)은 이 세계는 오로지 음(陰)으로만 가득한 것도, 양(陽)으로만 가득한 것도 없다는 이치를 말해준다. 오히려 두 마리의 물고기가 함께 빙빙 돌며 놀 듯, 끊임없이 서로 순환하며 변화의 지점을 만든다. 생(生)이 있으면 사(死)가 있고, 사(死)가 있어야 또 다른 생(生)이 존재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을 마주하거나, 그동안 쌓아 올린 많은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혹은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울과 슬럼프를 겪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가 고통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깊은 어둠 속에서 드디어 아주 작은 빛이 반짝이며 태어날 것이니.







위 글은 경기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39호의 프롤로그를 위해 썼습니다. 웹진은 아래 링크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지지봄봄> 39호 '겨울의 두께'

작가의 이전글 도덕경 43장 물과 같아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