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왕릉원에서 부여읍내로 들어오는 길은 부여가 가지고 있는 지금 현실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한 나라의 수도였지만 철저하게 파괴되고 겨우 살아남았지만 아직까지도 옛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직도 1980년대에 머무른 듯 한 풍경이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 없는 것이 이곳 사람들과 관광객들에는 못내 아쉬울 지라도 나는 지금 이 모습이 더 좋다. 앞으로 얼마든지 더 멋진 도시로 만들어질 수 있는 여백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조금만 예산을 투입한다면 도로보다 더 큰 숲길과 인도를 만들 수 있고, 자전거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 수도 있다. 부소산성에서 궁남지까지 왕의 행차길로 만들 수도 있겠다. 가우디를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셀로나를 찾듯이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멋있는 곳이 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곳이라 생각한다.어디서나 본 듯 한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 한다고 경쟁력있는 도시로 성장하기는 이제는힘듬을 인정해야 한다. 지방 소멸의 시대를 맞이하여 살아남는 길은 특색있는 도시의 모습이 아닐까?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슬로시티로서 옛 모습을 간직하고 누구에게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줄 수 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부여 여행의 일번지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바로 위에는 부여박물관이 있었다. 이제껏 많이도 이야기했지만 실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넓게 마련된 주차장에서 정림사지까지는 소나무 숲길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참 낭만적인 사람이 아닐까 한다. 부여를 이런 식으로 조금씩 변모 시킨다면 분명 우리들이 사랑하는 부여가 될 것이다. 이 소나무 숲길의 한 공간을 빌려 휴식을 취하면서 정림사지 근처에 있는 농**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짜지않고 담백한 맛에 특색있는 김밥도 있어서 다음에도 부여에 오면 사먹을 생각이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들어서는 순간 이런 석탑의 아름다움이라니. 텅 빈 마당에 솟아 있는 석탑은 백제 장인들의 명품이었다. 확연히 신라의 탑과는 다른 세련미가 있었다. 크게 멋을 들이지 않고 살짝 들어 올렸는데 멋진 춤사위가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5층의 석탑이지만 하늘을 침범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땅으로 숨지도 않았다. 유홍준 교수가 추사와 원교의 글씨를 비교하면서 추사는 완자와 비슷하고 원교는 칼국수 면발과 비슷하다고 한 적이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는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아 이거 추사체와 비슷하다 였다. 감상은 지극히 개인의 영역이고 강요해서는 안되지만 비교해서 보시면 그전에 알고 보던 탑과는 다른 모습이 보일 것이라 자부한다. 특히
지붕돌의 모습이 추사의 글씨와 정말 비슷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백제의 탑이 딱 2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이것이다. 아쉬움은 후대의 몫인가. 그나마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기념으로 글씨를 새겨놓아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니 역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제시대 남대문과 동대문이 살아남은 것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한양으로 입성한 기념으로 없애지 않았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청도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에 난 상처에서 받은 느낌은 이것과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슬픔을 꾹꾹 참고 견디면서 1500년을 살아온 석탑에게 경의를 표한다.
정림사지 5층 석탑 옆으로는 박물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박물관 건물 자체도 외형이 옛 건물의 모습으로 건축되어 콘크리트로 만든 일반적인 박물관이 주는 느낌과 확연히 달랐다. 박물관에서 보는 것 중에 단연 압권은 불상들이 끊임없이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인피니티 룸'이었다.
정림사지를 나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부소산성이다. 부여를 말할 때 백마강을 빼놓을 수 없고,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을 놓칠 수는 없다. 낙화암은 부소산성안에 있다.
부여 사람들에게 백제는 어떤 의미일까. 경주처럼 많은 문화재를 남겨주지도 못하면서 개발도 가로막는 존재일까 아니면 한 나라의 왕도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주는 존재일까. 최소한 부여 사람들에게 백제는 휴식처를 준 것만은 확실하다. 그 휴식처의 일번지는 부소산성이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사비도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더운 날 낙화암까지 걸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다닌다면 아이들을 얼레고 달래야 하는 수고로움도 더해야 한다. 예전 대학 다닐 때 이곳에 왔을 때는일본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내가 그땐 세계화가 덜 된 사람이라 신기했을 뿐이다. 코로나로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녀교육을 위한 가족 단위,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낙화암의 3천궁녀 이야기의 진실은 제쳐두고 라도 나당연합군에게 쫓겨 이곳까지 몰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들에게 적에게 함락당한 사비의 모습은 어땠을까. 낙화암에 부는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시원했고 백마강 유람선의 안내 방송도 여전했다. 예전에는 유람선을 타고 부소산성에 왔었다. 아이를 업고 고란사를 거쳐 낙화암까지 왔던 기억이 있다. 두 가지 방법 모두 시간 여유가 되면 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유홍준 교수는 정림사지는 아침 안개가 낄 때 가고 부소산성은 저녁 해질 때 가면 좋다고 했는데, 다음에는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천천히 부여를 둘러보며 느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