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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 주는 모기나라 Oct 23. 2021

부여여행- 첫 번째 이야기

부여 왕릉원 -사비시대 왕족들의 영혼 쉼터

고구려 장수왕은 427년 수많은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교과서에는 도읍을 옮긴 이유 중의 하나로 남진 정책이라고 쓰고 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475년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해버렸다. 고구려의 대군에 맞서 개로왕은 동맹국 신라에 도움을 청하게 되고 나중에 문주왕이 되는 아들(동생이라는 이야기도 있음)을 신라로 보냈다. 그러나 원군이  미처 오기 전에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임을 당했다. 결국 문주왕은 발걸음을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공주는 산세가 험하고 금강을 끼고 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곳이다. 고구려군의 추격을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공주는 한 나라의 도읍으로 하기에는 공간이 좁았다. 그래서 백제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면 새로운 도읍지가 필요했다.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성왕이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왕은 금강 하류인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다시 한번 백제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교역도 훨씬 쉬웠다. 성왕의 꿈이 담긴 부여는 이미 1500년 전에 계획도시로 만들었다. 지금 우리나라 서울이 난개발 된 것을 본다면 조상보다 못한 후손이라 욕먹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일반 사람들에게 부여 가는 길은 큰 마음을 먹어야 될 정도로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교통이 편리한 곳도 아닐뿐더러 신라의 문화재들이 시각적으로 많이 남아있는 경주, 무령왕릉 하나만으로 충분히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공주만큼 부여하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주의 인공적인 냄새와는 다른 자연의 냄새가 많이 남아있고, 공주는 시내를 한 바퀴 돌면 끝나는 분위기라면 부여는 며칠을 두고 이곳저곳 갈 곳이 꽤 많은 곳이다. 나도 부여는 몇 번 왔지만 코끼리 장님 만지는 수준으로 부여를 알고 있을 뿐이다.


수도가 될 뻔했던 세종과 수도였던 공주를 지나면 금강을 따라 부여까지는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공주를 벗어나면 백제시대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거의 비슷한 모습을 봤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변한 것은 없다. 그만큼 이곳은 개발에서 벗어나 있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이야 자고 나면 언론에서 떠드는 몇 억씩 뛰는 아파트 값과 땅값이 부럽겠지만 대한민국 어디쯤에는 그런 개발의 열풍에서 벗어나 옛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곳 있는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부여 여행의 부여 왕릉원에서 시작한다. 얼마 전까지 능산리 고분군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부여로 들어오는 입구에 왕릉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답사 동선이 자연스럽다. 옛 기억과 현재의 모습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존재할까? 예전의 작은 주차장을 대신해서 이제는 제법 잘 갖추어진 주차장이 있었다. 예전에는 왕릉의 정면으로 걸어가면서 답사가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옆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답사가 시작되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왕릉으로 들어갔다. 매표소 입구의 매점은 먼저가 뿌였게 쌓여있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문화재급에 있는 가게가 문을 닫았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문화 정책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한다.


왕릉으로 가는 길은 바닥에 블럭을 깔고 그 위에 사비시대 왕들을 새겨놓았는데 제법 걷는 길이 운치가 있었다.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주고 있어서 더운 날에도 충분히 시원하게 답사를 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왕릉 앞의 잔디와 나무는 여전히 여백의 미를 보여주었고, 마음을 비워두어도 될 만큼 평화로웠다. 왕릉 앞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즐기는 휴식을 즐긴다면 보는 이에게는 낭만의 대상이요 부러움의 대상일 것이다.

7개의 무덤이 복원되어 있는 왕릉원은 유홍준 교수가 우리 나라에서 이렇게 멋있게 복원한 곳이 있을까 하고 극찬을 했던 곳이기도 한다. 여전히 왕릉원은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다만 왕릉 앞으로 쇠로 만든 담장이 가로막고 있어서 마치 동물원에 갇혀 있는 덩치 큰 동물같어 보여 조금은 안타까웠다. 왕릉을 바라보는 것보다 왕릉이 바라보는 것이 더 좋은 곳이다. 부석사의 절을 보는 것보다 무량수전에 바라보는 바깥 세상이 더 멋있는 것처럼. 왕릉원은 신라의 평지도 아니고, 가야처럼 산을 올라야 하는 것도 아닌 적당한 경사면에 만들어진 왕릉에서 부여 들판을 바라보는 것도 참 멋있다. 왕족들은 죽어서도 호강하는구나.

백제의 무덤이 그러하듯 이곳의 무덤들도 몽땅 도굴되어 남아있는 것이 없다. 어딘가에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가끔 발굴되는 백제의 유물들을 보면 이곳 왕릉에 넣었을 껴묻거리는 어떤 수준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만 고구려의 고분에 많이 그려져 있는 사신도가 이곳에도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왕릉원 옆으로는 그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절터가 있다. 원래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서 공사를 하다가 절터가 발견되어 서둘러 발굴을 끝내려고 하다가 우리 고대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향로가 발견되었으니 운명은 참 모를 일이다. 추운 겨울 발굴현장에  계곡을 따라 물이 계속 들어와서 발굴단이 엄청 고생했다는 기사도 본 적이 있다. 아무런 사명감 없이 대충 발굴하고 끝냈다면 어쩌면 영원히 시멘트 바닥에 있어야만 했을 백제의 위대한 유산이 한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당연합군이 공격으로 피난을 가야 했던 한 사람이 향로를 급하게 묻어두고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했으나 결국 향불을 꺼지고 기억 속에서도 꺼져버린 그 전쟁 중의 다급함에 대해 글을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은 절터를 발굴 당시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그 옆으로 백제의 나성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왕릉원은 백제의 나성 밖에 있다. 왕족의 무덤을 성 안이 아닌 밖에다 두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공간을 분리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스러운 공간을 찾다 보니 이곳으로 정한 것인가

부여 여행의 첫 번째가 부여 왕릉원이라면 부여 여행의 일번지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아닌가? 다음 코스는 바로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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