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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키노의 긍정적인 방문자

뻔한, 삿포로 여행기 1

by 이예은

언젠가부터 여행이, SNS에서 비현실적으로 포장된 광경의 민낯을 보는 따분한 경험의 반복처럼 느껴졌다. 여행보다 일상이 요행이고, 해외 생활보다 고향 살이가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삶의 형태 탓일 수도 있지만, 한 달 살이(<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보다 경험의 깊이는 얕고, 가벼운 나들이(<도쿄 근교를 산책합니다>)보다 값비싼 3박 4일 정도의 여행을 내심 평가절하해 왔음을 인정한다.


도쿄에 만 9년을 살면서 한 번도 홋카이도 섬을 밟지 않은 것도, 그런 편협함, 또는 게으름 탓이었을 것이다. 기온이 10도 밑으로 떨어지면 집밖으로도 나가려 하지 않는 내게 홋카이도 겨울 여행은 애초에 탐스럽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본 한여름의 라벤더 밭 풍경이 오랜 잔상을 남겼는데, ’실제로 가면 관광객이 더 많고, 사진보다 덜 아름다울 것‘이라는 학습된 추론으로 체념해 왔다. 어쩌면 경제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기에 그 보랏빛 환상이 신 포도일 것이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여유와 의욕을 조금은 회복한 2025년 여름, 도쿄와 삿포로를 왕복하는 항공편을 구매했다. 비행기값 만 3천엔에 허락된 짐은 기내 수하물 7kg. 숙소에서는 삿포로 맥주와 니카 위스키에 취해 잠만 잘 예정이었지만, 개인 화장실과 샤워실, 그리고 최소한의 안정성과 편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면 1박에 만엔 이상은 주어야 했다.


첫날에는 스스키노에서 짐을 푼 뒤 삿포로 시내에서 징기스칸을 구워 먹고, 둘째 날에는 버스투어로 꽃밭과 호수를 구경하고, 셋째 날에는 오타루를 관광한 뒤, 넷째 날에 도쿄로 돌아온다는 클리셰와 다름없는 계획이, 몇 번의 검색만으로 완성되었다. 아, 수프카레랑 삿포로라멘도 먹고(결국에는 못 먹었다). 그리고 카이센동, 보다는 스시가 낫겠지.


그 후로 누군가 여름휴가 계획을 물어볼 때마다 ‘혼자 삿포로 가려고요‘라는 대답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7월이 되었고, 놀랍게도 일행이 생겼다. 건강 문제로 두 달 동안 휴직을 하다 보니 젊을 때 하나라도 눈에 더 담고 싶어 졌다는, 첫 직장에서 만난 S.


출발일까지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작업 중인 번역물을 한 페이지라도 더 완성하느라, 삿포로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기 위해 술을 자제하고 운동을 가까이하느라, 그리고 이번 여행뿐 아니라 생계의 최대 지원자인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느라.


느릿느릿 다가온 여행의 첫날, 아침에 백팩에 짐을 놓으면서도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은 쓸데없이 일찍 떠져 느긋하게 아침까지 챙겨 먹고서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서울에서 오고 있을 S에게 별의미 없는 메시지와 이모티콘도 보냈다. 계획보다 일찍 집을 나섰지만 나리타공항으로 가는 전철이 지연되어 계획대로 도착했고, 게이트 앞 매점에서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백엔짜리 오니기리와 그나마 가장 맛있어 보이는 9백엔 카츠샌드 사이에서 고민하다 답지 않게 카츠샌드를 골랐다. 여행자의 호기였다.


중년의 일본인 부부 옆 복도 자리에 자동 배치된 나는 두 시간 동안 황석희 번역가님의 <오역하는 말들>을 읽다 신치토세 공항에 내렸다. 아, 처음 발을 디딘 곳은 공항 바깥이었구나. 도쿄보다 확연히 서늘한 바람에 ‘涼しい(시원해)’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에어컨을 켠 버스 안에서는 ‘寒い(춥네)’라는 탄식도 간간이 터져 나왔다.


신치토세 공항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관광지로 손색없었다. 국내선에서 국제선 로비로 가는 길에는 갖은 상점과 식당이 빼곡히 모여 있었고, 에스컬레이터로 한 층을 더 올라가니 로이스 초콜릿 팩토리와 여러 캐릭터 숍이 늘어서 있었다. 1시간 뒤에 도착할 S를 기다리며 구경한 로이스 매장에서는 아일라 위스키 맛 생초콜릿과 장미 모양의 피낭시에가 눈에 띄었다.(마지막 날에 사리라 다짐했지만, 결국 사지 못했다)


공항 마중의 가장 큰 즐거움은 대기 장소를 공유하는 주변인 관찰이다. 타인에게는 타인에 불과한 건조한 표정의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이나 지인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천진한 미소와 함께 돌고래 울음과 같은 탄성을 내지른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수 년 만에 만난 S의 변함없는 얼굴을 보고 힘껏 손을 흔들었을 때.


“S야, 스스키노역까지 한 번에 가려면 버스가 낫고, 전철로 가면 20분 정도 단축 되는데 한 번 갈아타야 해. 비용은 비슷한데, 어느 쪽이 더 좋아? 나는 둘 다 괜찮아.“


미리 알아본 선택지를 제시한 후 의례 그러하듯 ‘나도 상관없어, 너 좋은 쪽으로 해’라는 친절을 주고받다, ‘짐도 가벼우니 조금이라도 빨리 삿포로 생맥주를 마시자’라는 본심이 일치함을 확인하고서, 전철역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나란히 앉은 전철 안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긍정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창문이 좀 더럽네?“
”필름 효과 같지 않아? 글로우 필터도 씌운. “
“진짜네. 예쁘다!“


호텔에 무사히 도착한 우리는 대강 짐을 풀고서(S는 내 백팩에서 원피스 네 벌이 나오는 걸 보고 놀라워했다) 곧장 징기스칸을 먹으러 길을 나섰다. 수많은 식당 중에서 선택한 곳은 아지노히츠지가오카​라는, 양고기를 구워 먹기에 지나치게 세련되지도, 허름하지도 않은 분위기의 가게. 저녁 식사치고 이른 5시 무렵에 방문해서인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들어갔고, 앉자마자 주문한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감탄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양고기의 향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질감은 소고기와 비슷하지만, 양고기만의 독특하고 이국적인 풍미가 있다. 양이 성장하면서 지방질에 카프릴산, 펠라르곤산이 축적되는 탓(혹은 덕분)이라는데, 그 이름만큼이나 생소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가게에서는 다리살과 목살, 어깨살, 롤 네 종류를 판매했는데, 우리는 호기롭게 모두 1인분 씩 주문했으나, 가장 맛있었던 부위가 어느 것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난관에 처했다.(그래서 확실히 아니었던 한 종류만을 제외하고 다시 3종을 추가 주문했다) 또, 함께 나오는 야채는 고기를 추가로 주문할 때만 리필이 가능하므로, 1인분이나 2인분씩 주문하는 편이 현명하다는 깨달음도 뒤늦게 얻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유쾌한 시행착오야말로 여행의 본질이니까.



둘이서 양고기 7인분과 맥주 다섯 잔을 마시고, 하늘이 울긋불긋해지기 시작한 스스키노 거리를 걸었다. 야외에 에어컨이라도 틀어놓은 듯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열기와 습도라는 고문에서 해방된 우리는 한껏 들떠, 이른바 ‘니카 상’이라고 불리는 전광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뒤, 견물생심을 증명하듯 THE NIKKA BAR​로 이동했다.


어둑하고 클래식한 분위기의 바에서 우리는 자릿세 천 엔과 맞바꾼 초콜릿 한 조각과 말린 과일 두 조각에, 타케츠루와 미야기쿄, 요이치 싱글몰트 샘플러를 천천히 음미했다. S는 밸런스가 좋은 타케츠루를, 나는 스모키향이 강한 요이치를 선호했고, 워스트로는 둘 다 달짝지근한 미야기쿄를 꼽았다. 그리고 계산 후에 리큐어 숍을 돌며 이런 우스운 대화를 나눴다.


“우리가 마신 위스키 말이야, 비싸게 사도 한 병에 만 엔인데, 샘플러 세 잔에 5천엔 가까이 나왔어.“
”그래도 시음 안 했으면 제일 구하기 쉬운 미야기쿄 사고 후회했을걸. 게다가 술은 어차피 마실 거였잖아.“
“그럼 돈을 절약한 셈이네!“



부모님 선물로 타케츠루 한 병을 사려던 S는, ‘위스키 선물이 들어왔으니 사지 말라‘라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곧장 단념했으며, 나는 리큐어 숍에서 니카 프롬 더 배럴의 모던한 디자인에 반해, 가격을 검색한 뒤 아마존에서 주문을 마쳤다.(결국 맛은 상관없었나 보다)


곧바로 잠을 청하기 아쉬웠기에 생수를 핑계로 들어간 편의점에서 홋카이도에만 있다는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와 과자를 사서 자그맣게 회포를 풀었다. 어쩌면 평소보다도 더 일찍 침대에 누웠을지도 모르겠다. 흡사 소풍을 기대하는 유치원생의 마음으로. 다음 날에는, 아주 오래전 삿포로 여행의 계기를 심어 준 라벤더 밭 투어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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