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슈켄트에서의 2년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
모처럼 아버지의 차를 타고 등교하던 날 아침, 내 삶의 궤도를 영원히 바꿔버린 그 한마디를 나는 기억한다.
예은아, 우즈베키스탄에 같이 갈래?
부모님께서는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보내야 했다. 대학 입시를 앞둔 오빠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중학생인 나까지 친척집에 맡기고 가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으리라.
우즈베키스탄. 그 생경한 여섯 글자가 당시 열여섯 살이던 내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저 새하얀 미지의 세계였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 우즈베키스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
하지만 호기심 가득한 중학교 3학년에게 낯섦은 곧 매력이었다. 어쩌면 남들과 다른 길을 택함으로써 특별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사춘기 소녀가 가족 중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한다면 서먹서먹한 오빠보다는 부모님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타슈켄트에서 2년을 살았다. 그 후로 독일과 홍콩, 다시 한국을 거쳐 지금은 일본에 살고 있지만, 거주했던 나라를 열거할 때 가장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곳은 역시 우즈베키스탄이다.
우즈베키스탄이요?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건 어땠어요?
이런 질문을 받아도 그럴싸한 답변이 생각나지 않기에, 가끔은 우즈베키스탄을 목록에서 쏙 빼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만 바뀌었을 뿐 부모님이 마련해주신 집에서 거저 주어지는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던 청소년의 일상은 별 다를 바 없었으니.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타슈켄트에서의 2년이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언젠가 내게 물어볼 사람들을 위해, 15여 년 전의 기억을 거슬러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건 어땠는지, 그리고 그곳이 나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타슈켄트에 도착했을 때,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낯선 냄새나 풍경도 아닌 우리 집이었다.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내가 살던 동네는 현지인 사이에서 부촌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타슈켄트에서 사는 동안 나는 운전기사님의 차를 타고 등하교했고, 청소와 빨래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님께서 도맡아 주셨다.
한국에서 부유한 편에 속한 것도, 부모님의 수입이 갑자기 높이 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우즈베키스탄의 물가가 한국에 비해 너무 저렴한 탓이었다. 전용 운전기사님에 가사도우미 아주머님까지 고용해도 월 30~40만 원밖에 들지 않았으니(물론 지금은 평균 임금도 물가도 훨씬 비싸졌으리라 생각한다).
청소년기에 피부로 느낀 ‘부의 상대성’은 내 경제관을 흔들어 놓았다. 내가 소속된 사회의 잣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A 나라에서 중하류층이었던 사람이 B 나라에서는 상류층이 될 수도, 또 C 나라에서는 극빈층이 될 수 있다는 기묘한 현실. 덕분에 지금도 남들과 수입이나 자산을 비교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덜하다.
우즈베키스탄의 로컬 푸드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어머니께서는 되도록 한식을 차려주셨지만, 시간이 지나자 현지 음식이 식탁에 오르는 일도 잦아졌다. 생각보다 입맛에 잘 맞았으므로.
가장 좋아했던 우즈베키스탄 요리는 미트파이와 비슷한 ‘쌈싸’와 양고기 꼬치구이인 ‘샤슬릭’. 물론 아침마다 먹었던 보름달 모양의 빵 ‘리뾰쉬카’와 기름 반, 밥 반인 ‘플롭’, 그리고 토마토, 오이, 양파를 소금에 살짝 절인 ‘아츠추’도 빼놓을 수 없다.
완전히 다른 지역 요리를 일찍이 체험한 덕분에 나는 이국적인 요리를 두려워하기는 커녕,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맛을 찾아 헤매는 훌륭한 탐식가로 성장했다. 어느 나라에 가나 잘 적응하는 점도 무난한 식성 덕분이 아닐까. 이 글을 쓰다 보니, 또 입에 침이 고인다.
누군가가 우즈베키스탄에 무슨 볼거리가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자신 있게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그리고 히바의 사진 보여준다. 모두 찬란했던 실크로드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표적인 유적지로, 중앙아시아 건축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 타슈켄트와 가까운 도시는 사마르칸트다. 칭기즈칸 이후 ‘대륙의 마지막 정복자’라 불리는 아미르 티무르가 중앙아시아를 통일한 뒤 수도로 삼은 곳이다. 사마르칸트는 15세기에 당대 최고의 부와 예술, 그리고 과학기술의 집결지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도시 지천에 널린 호화로운 건축물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푸른 돔과 첨탑, 그리고 기하학적 문양이 특징인 이슬람 사원과 학교, 궁전은 멀리서 바라보면 그 웅장함에 한 번, 가까이 다가가면 정교함에 또 한 번 압도된다. 이처럼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이 청소년기에 거저 주어졌다는 사실은 무척 감사해 마땅한 일이다.
당시 나는 타슈켄트에 가면 한국인 거의 없을 줄 알았지만, 순진한 생각이었다. 주재원과 사업과, 봉사자, 클래식 악기 또는 발레 유학생 등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이곳에서 삶을 꾸리고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웠던 사실은 이곳에서 태어나 현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한국인의 존재였다. 19세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 러시아로 이주했다가 소련 정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국인의 후손이었다. 이들은 고국으로부터는 ‘고려인’이라고, 또 현지에서는 ‘카레이스키(한국인)’라고 불리며 경계선 위에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고려인과 직접 교류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이들의 존재만큼은 뇌리에 깊이 박혔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비극적인 역사에 휘말려 원치 않는 땅에 뿌리내려야 했던 사람과 그 후손들. 과거와 달리 이제는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차별의 원인이 아닌, 자부심과 방패막이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지만, 나는 현지 학교가 아닌 외국인 국제학교에서 영어로 수업을 받았다. 덕분에 영어실력은 일취월장했지만, 일상생활에서 좀처럼 현지인과 교류하거나 우즈베크어, 혹은 러시아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즉, 2년간 이방인으로 맴돌았던 셈. 그러니 우즈베키스탄인의 생활 관습이나 사고방식 등에 대해서는 관광객보다 무지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립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현지 문화 속에 들어가 미처 몰랐던 매력을 재발견하고 싶어서다. 아마도 그런 다음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살아봤다는 사실을 좀 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