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종식을 기다리며 쓰는 여행 칼럼
2020년 4월 7일, 싱가포르는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해 의료와 금융, 운송업, 식료품점 등 생활에 꼭 필요한 업종을 제외한 상업시설에 '락다운(lockdown)'을 선포했다. 테이크아웃을 제외한 레스토랑과 바, 카페도 자연히 문을 닫기에, 싱가포르에 사는 지인들은 하루 전날 저마다의 단골 가게를 방문해 마지막 호사를 누린 듯했다.
그 모습에 오랫동안 서랍에 담아 둔 이 글이 떠올랐다. 지난 2018년 8월부터 1년간 싱가포르에 살며 인상 깊었던 경험을 '내가 사랑한 싱가포르의 맛'과 '싱가포르, 자연을 재창조하다'라는 기사로 정리해 브런치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세 번째 글인 '싱가포르의 이색적인 애프터눈 티 3곳'은 구성만 짜둔 째 좀처럼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애프터눈 티라는 사치가 금기가 되어버린 지금 갑자기 이 기사를 쓰고 싶어 진 이유는, 감염병이 도래하기 전 내 일상의 ‘하이라이트’를 추억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가 끝나면,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가 내가 좋아하는 장소, 그리고 사람들과 뜨거운 인사를 나누고 싶다.
싱가포르에 애프터눈 티 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굴곡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애프터눈 티는 본래 19세기 영국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문화로, 점심과 저녁 시간 사이 홍차에 스콘과 잼, 타르트, 초콜릿 등 각종 티푸드를 곁들여 먹던 데에서 유래했다. 주로 응접실이나 정원의 낮은 테이블에서 즐겼기에 '로우 티(low tea)'라고도 불렸다. 요즘은 경계가 모호해졌지만, 느지막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온 노동자들이 높은 다이닝 테이블에서 푸짐하게 차려놓고 즐기던 '하이 티(high tea)'와는 구분된다. 싱가포르는 1819년부터 1963년까지, 일본 점령기를(1942~1945) 제외한 144년 동안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니, 그 긴 세월 동안 애프터눈 티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전형적인 '홍차와 3단 트레이'식 애프터눈 티라면, 굳이 싱가포르까지 가서 경험할 필요가 있을까. 유럽으로 순간 이동한 듯한 호텔 라운지도 셀 수 없이 많지만, 이번 기사에서는 싱가포르이기에 방문할 가치가 있는 특별한 '오후의 차' 명소를 소개해보려 한다.
싱가포르에서의 첫 애프터눈 티를 제니스 웡 레스토랑에서 즐긴 것은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양식 셰프라고는 폴 보퀴즈와 고든 램지 정도밖에 몰랐던 내게 아시아를 대표하는 디저트 셰프 '제니스 웡'의 이름을 똑똑히 각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제니스 웡은 프랑스의 명문 요리 학교인 ‘르 코르동 블루’를 졸업하고, 토마스 켈러와 피에르 에르메 등 세계적인 파티시에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섬세한 맛은 기본, 시선을 유혹하는 과감한 컬러와 디자인, 그리고 독창성을 무기로 ‘산펠레그리노 아시아 50 베스트‘에서 아시아 최고 파티시에 셰프로 선정됐다. 그것도 두 번이나. 지금은 런던과 도쿄, 서울에도 매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녀의 요리 세계를 제대로 체험하려면 역시 싱가포르만 한 곳이 없을 것이다.
제니스 웡 싱가포르에서 맛본 애프터눈 티는 메뉴 구성부터 프레젠테이션까지 파격 그 자체였다. 엄연한 중식 요리인 딤섬과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찹쌀떡, 그리고 서양식 브라우니 등 오묘하게 어우러진 테이블은 ‘디저트의 용광로'와도 같았다. 그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절묘한 밸런스와 탄탄한 맛 덕분에 자꾸만 손이 갔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낯설고 신비로웠던 경험을 더 많은 여행객에게 전하고 싶으나, 기사를 작성하던 도중 이곳이 문을 닫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니스 웡의 디저트는 창이국제공항과 여러 쇼핑몰에 입점한 매장, 그리고 2am 디저트 바(2am:dessertbar)에서도 맛볼 수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 말 것.
제니스 웡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점
주소: 창이국제공항 T3 출발층 #02-K11
영업시간: 매일 6:00 AM~익일 새벽 1:00 AM
2am 디저트 바
주소: 로롱 리풋(Lorong Liput) 21A
영업시간:
화~금 - 15:00~익일 새벽 2:00
토~일 - 14:00~익일 새벽 2:00
공식 홈페이지: https://www.janicewong.com.sg
싱가포르에서 차를 논한다면 럭셔리 티의 대명사, TWG를 빼놓을 수 없다. TWG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두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는 설립년도가 로고에 적힌 1837년이 아니라 2008년이라는 점이다. 1837년은 상공회의소의 설립을 통해 싱가포르가 차 무역의 거점으로 발돋움한 해로, 브랜드가 기념코자 하는 유산에 가깝다. 두 번째 비밀은 바로 이름. TWG의 'T'가 당연히 'Tea(차)'의 약자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The Wellbeing Group(더 웰빙 그룹)'이라는 다소 심심한 기업명의 부사(the)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처럼 의외의 반전을 보유한 TWG지만, 현지인에게 일상적인 음료였던 차를 단숨에 명품으로 승화시킨 비상함에는 감탄이 나온다. 또한, 무려 800종이 넘는 방대한 티 컬렉션과 레트로하면서도 세련된 패키지, 그리고 품격 있는 인테리어는 여행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하다.
싱가포르에는 수많은 TWG 티 살롱이 있지만, 모처럼의 애프터눈 티를 위해서라면 마리나베이샌즈가 좋겠다. 고풍스럽고 차분한 실내 부티크 겸 살롱인 TWG 티 온 더 베이(TWG Tea on the Bay)와 화려하고 개방감 넘치는 TWG 티 가든(TWG Tea Garden) 두 가지 옵션을 제공하기 때문. 물론 쇼핑과 관광에 바닥난 체력을 재충전하기에도 그만이다.
마리나베이샌즈 TWG 부티크 & 살롱
주소:
TWG 티 온 더 베이 - 마리나베이샌즈 더 샵스 갤러리아층 B1-122/125
TWG 티 가든 - 마리나베이샌즈의 더 샵스 캐널층 B2-65
영업시간: 10:00~22:30(주말 및 공휴일 전날은 24:00까지)
공식 홈페이지: https://twgtea.com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후의 차’는 결코 서양의 전유물이 아니다. 차의 발상지인 동양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다도와 다회 문화가 존재했으며, 그 방대한 종류와 고유한 맛, 그리고 세분화된 예절은 서양식 애프터눈 티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복잡하고 까다로운 예절을 일일이 지키며 차를 마시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안타까움에서 1989년, 중국 전통 다도를 계승하고자 차이나타운에 문을 연 티 챕터는 단순한 찻집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이곳의 위상은 오픈 직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을 방문하며, 현지인과 관광객 사이에서 더욱 높아졌다.
비록 티 챕터에서 호화로운 애프터눈 티 세트를 찾을 순 없지만, 고즈넉하고 노스탤직한 분위기 속에서 중국식 다도를 체험하기엔 더할 나위 없다. 물론 향긋한 차에 곁들이기 좋은 전통 간식과 디저트도 다채롭게 준비되어 있으니, 이곳에서 나만의 애프터눈 티 문화를 만들어봐도 좋겠다.
티 챕터
주소: 네일 로드(Neil Road) 9
영업시간: 11:00~21:00(금, 토는 22:30까지)
공식 홈페이지: https://teachap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