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삿포로 여행기 3
타는 순간부터 내리는 순간까지 10시간을 꽉 채운 버스 투어를 마치고 나니, 삿포로의 여름밤이 서서히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가이드 선생님과 연락하기 위해 개설한 오픈 채팅방에서는 누군가가 신분증을 놔두고 갔다는 다급한 공지가 떴고, S와 나는(우리가 그 주인공이 아님에 안도하며) 선생님께서 선별해 준 맛집 리스트에 따라 수프카레 가게인 타이거카레에 들어갔다. 사실 오피스 건물의 푸드 코트에 입점되어 있으니, 가게에 들어갔다기보다는 주문한 음식을 받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선생님의 추천에 따라 기본 닭고기 카레를 주문하되, 국물은 새우맛, 맵기는 3단계로 변경했다. 수프카레의 질감은 흔히 콘수프나 클램차우더 수프에서 떠올리는 걸쭉함보다는 맑은 국의 그것에 가까웠다. 새우의 감칠맛과 추가 요금을 내고 높인 매콤함이 느끼함을 잡아 주어, 한 입 한 입 넘길 때마다 속이 풀리는 개운함과 중독적인 풍미만이 남았다. 넉넉하고 부드러운 닭고기도 닭고기였지만, 한 번 기름에 튀겨서 끓인 브로콜리의 달콤함과 포슬포슬한 꽃눈에 밴 카레향의 조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노트에 ‘브로콜리 추가’라고도 적혀 있었는데, 이미 들어 있다고 추가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카레를 먹고 나와 부족해진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ATM에 들렀다가, 아침에 본 삿포로TV타워에 무작정 올라갔다. 여행 기간 중 전망대에 갈 계획은 없었기에, 도심에서라도 한 번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을 눈에 담고 싶었던 듯하다. 타워의 투박한 외관은 썩 탐스럽지 않았지만, 협소한 전망대에서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은 여지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S는 노을이 붉게 물드는 쪽이 기념품 숍에 가려져 있어 아쉬워했고, 나는 그 황홀한 여름의 색채를 담지 못하는 카메라에 답답해했다(물론, 내 실력 탓이다).
노을마저 저물어갈 무렵, 다시 돌아온 삿포로TV타워 아래에는 노상 바비큐가 한창이었다. 일정 요금을 지불하면 주어진 시간 동안 고기와 술을 무제한 마실 수 있는 저렴한 코스 덕분에 인근 직장인들의 회식이 한창이었다. 그중 양복을 입은 누군가가 무례한 말투로 같이 한 잔 하러 가자며 말을 걸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S와 한국어로 계속 대화하며 일본어로 모르는 척 걸음을 재촉하자, 뒤에서 그 일행이 ‘(순화해서) 야, 이 멍청아, 저 언니들 일본어 몰라’라며 핀잔하는 소리가 들렸다. 취기가 상당해 보였기에 물리적 행패라도 부릴까 신경이 곤두 서 있었는데, 이럴 때는 관광객 행세가 편리하구나, 싶었다.
삿포로에서의 둘째 날을 삿포로 맥주 없이 마무리할 수 없었던 우리는 삿포로 ‘퍼펙트’ 생맥주를 맛볼 수 있다는 BEER BAR THE SAPPORO STARS moyuk SAPPORO으로 향했다. 일반 생맥주가 잔 안에 맥주를 단숨에 들이부어 거품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둔다면, ‘퍼펙트’라고 이름 붙인 생맥주는 거품이 더욱 오밀조밀해지도록 일부러 넘치게 따른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삿포로에서 요구하는 크리미한 거품과 깨끗한 잔, 차가운 온도 등의 조건을 인정받아야 이 이름을 쓸 수 있다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가난한 미각은, 맥주가 들어오기야 한다면 무엇이든 두 팔 벌려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그 차이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연거푸 들이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삿포로 블랙 라벨과 클래식, 개척사맥주까지 골고루 맛본 뒤 펍을 나와, 이제야 조금은 익숙해진 스스키노 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아직 이곳에서 보낼 수 있는 온전한 하루가 남아 있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노란 호텔 방 문을 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