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말들
뉴라이트 역사관이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의가 한창일 때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그냥 무시했다. 논의 자체에 관심도 두지 않았으며 왜 저런 주장을 할까라는 성찰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위안부를 두고 “성노예가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간 것이다.”라는 주장을 펴는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착잡하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내가 살아있는 증인이다”라는 절절한 외침을 들어서 더 그렇다.
최근에 후지이 다케시 칼럼집 『무명의 말들』을 읽었다. 후지이 다케시는 우리나라에서 역사 공부를 하고 강의를 하고 역사문제연구소 실장을 지내다 지난 2018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겨레 신문을 보면서도 당시에는 그에 칼럼을 지나쳤다. <무명의 말들>을 읽으면서 후회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진즉에 알았다면 나도 좀 달라졌을 텐데 싶어서 말이다.
위안부 문제가 불거져서 그런지 위안부 운동을 한 경험을 담은 칼럼들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특히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밝힌 칼럼 <‘현재를 묻는다는 것>은 위안부 피해자를 대상화했다는 걸 깨닫게 했다. 후지이 다케시는 일본에서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에 참여해 왔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는 과거에 속하지만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는 현재의 문제이고 자신이 현재라는 시간을 매개로 위안 문제를 알게 되었으니 현재를 묻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그런데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과거와 현재를 분리에 위안부 문제를 과거의 문제로만 다루며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당사자와 지원자라는 이분법임을 지적했다. 이런 이분법 속에선 할머니들은 피해의 당사자에, 운동에 나서는 이들은 봉사자에만 머물게 되니 새로운 사회는 생성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후지이 다케시는 세월호라 부르지 말고 4.16으로 부르자고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데서 머무는 게 아니라 가해자라고 생각하기에 부박한 현실을 견뎌내고 살아나가기 위해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후지이 다케시는 역사교육의 중요성도 여러 칼럼에서 이야기한다. 역사 교육의 핵심은 학생들이 자신의 사유를 현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현재의 질서도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며 그 과정 속에는 현재와 다른 다양한 미래의 가능성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현재의 단순한 연장이 아닌 미래에 대해 스스로 고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역사 교육의 중요한 기능임을 설명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것도 미래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와의 대결이라며 과거가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를 비우지 않는 한 미래가 들어설 자리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적폐 위에 있기에 4.16의 비극이 가능해졌는지 밝혀내고 그것이 더 이상 연장되지 않게 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의 앞날 역시 일본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일본인인 후지이 다케시는 한국사회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하고 싶었던 걸까. 칼럼을 쓴 시기가 2014년부터 2017년까지다. 4.16이 일어나고,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시민의 힘으로, 촛불의 힘으로 말이다. 촛불의 힘으로 모든 걸 다 바꿔냈다고 착각에 빠진 순간 적폐 청산은 더뎌졌고, 민주주의가 확장됐는 줄 알았는데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을 반영하지 않는다. 차별과 혐오는 넘쳐나 너와 나를 가른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후지이 다케시는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는 명령이 거부될 때 변하기 시작한다며 명령을 거부하고 대화를 시작하자고, 모두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직접 민주주의라고, 차별금지법에 관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촛불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들이 싸워나가고 있듯이 우리도 저항의 역사를 우리 삶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야 새로운 미래도 있을 거라고 어서 대화를 시작하자고 권한다.
<무명의 말들>에는 유고집이라는 타이틀이 걸렸다. (글쓴이 후지이 다케시는 죽지 않았다.) 자신의 글이 더 이상 제 것이 아니기에 마음대로 묻어버릴 수도 없는 것임을 깨달아 내놓은 책이라고 서문에서 밝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와 삶에 대한 성찰도 고마웠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 현재에 도움이 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깨달음도 덩달아 얻어 생각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