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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이들 Feb 13. 2022

[독립생활] 가방을 쌀 것인지, 짐을 풀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한단다.


한 3년 전쯤 일이다.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직후였다. 5년 전쯤 같이 고시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아침부터 밤까지 밀폐된 공간에서 비슷한 꿈을 꾸며 한솥밥을 먹으며 나름 인생의 고락을 함께 넘었으나, 이제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런 모임이었다. 나도 당시엔 순례길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던 때라 하루 30km 걸은 이야기, 매일 루틴 하게 가방을 싸다 보니 가방 싸기에 달인이 된 점, ‘가방을 쌀 때는 말이야~’ 뭐 이런 순례자플래인 같은 이야기를 신나게 주고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뜸 한 오빠가 이런 말을 했다.


“왠지 2주 안에 네게 누군가 뭔가 하자는 제안이 들어올 것 같아.
그때 너는 선택을 해야 할 거야. 짐을 쌀 건지, 짐을 풀 건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니, 지가 점쟁이도 아니고 말이야. 2주 안에 뭐가 와?’

콧방귀를 뀌었다.


이 오빠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한창 원하는 회사에 떨어져서 3일을 밥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세상이 무너져라 울다가 이를 악 깨물고 다시 토익학원 종일반 접수를 하고 100명씩 있는 강의장 한복판에 앉아서도 눈물을 하염없이 뚝뚝 흘리며 김밥을 입으로 넣는지 코로 넣는지 모르게 욱여넣고 있을 때 한다는 말이, ‘너만 힘든 거 아냐’라는 막말을 한 죄로 나에게 여전히 쿠사리를 들으며 수년째 소고기를 사주고 있는 그런 오빠였다. 대략 서로 간에 연민과 짠한 우정이 있단 뜻이다.


“여기서 살려고 해도 일거리가 있어야지. 뭐, 오빠가 일이라도 주게?”

라고 되물었는데 한참 가만히 있다가 이 오빠가 또 하는 말이,


“외주? 줄 수 있지. 하지만 너는 너의 중심이 있는 사람이야. 너한테 내가 만약 미인 대회의 영상을 섹시하게 촬영하고 편집해서 달라고 하면 할 수 있겠어? 난 네가 하고 싶지 않아 할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아.”


일 안 준다는 소리를 이렇게 창의적으로 야무지게도 하는구나 싶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한번 해본다 했더라도 오래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면서도 괴로워했을 테니까. 오빠는 다시 말했다. 너는 멋있는 사람이라고. 다만 선택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동안 그 질문이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짐을 풀 것인가, 쌀 것인가.


짐을 싼다는 건 평생을 여행자가 되어 살아가겠다는 뜻이었다. 반면, 짐을 푼다면 나는 이곳에 정착하여 다시 일을 알아보고 안정된 어떤 것들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해야 할지 모른다. 고민이 되었다. 방랑자로 살고 싶진 않았다. 나름대로 20대에 꽤 많은 여행을 다녔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삶 자체가 여행인 사람들도 있었다. 인생에 달관한 태도가 편안해 보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 모습이 상황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달관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사람들이 내 미래라고 생각하니 그건 내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평생 억지로 하면서 꾸역꾸역 정착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의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만 할 것인지 막막하고 깜깜하여 혼란스러웠다. 이게 다 아홉수 때문이라고. 괜히 아홉수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지잉, 지잉. 두 개의 문자가 왔다.


“영국 워킹홀리데이 합격”

“콘텐츠 공모 제작지원 합격”


영국 워킹 홀리데이 신청은 산티아고에 가기 전에 준비하던 일이었다.(모두 코로나 시국 전의 일들이다.) 한국에서 취업이 잘 풀리지 않았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영어를 잘 익혀두면 어디서든 먹고는 살겠지 싶어서 영국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려고 준비하다가, 인생 계획에 없던 산티아고를 다녀온 시점에 느닷없이 이제 영국으로 와도 좋다는 합격 문자가 온 것이다. 한편, 콘텐츠 공모 제작 지원 사업도 산티아고에 가기 바로 직전에 작성했던 서류였는데 붙을 거라 생각하진 않고 썼는데 그게 붙었다는 것이었다.


진짜 이 오빠 점쟁이 아냐?


결론적으로 짐을 쌀 것이니, 풀 것이니. 그 질문에 나는 짐을 풀었다. 그리고 [산티아고 가방] 안이라면 불필요한 무수한 가구와 옷가지들과 컴퓨터와 책상을 [집]에 들이고, 커튼도 달고 주방도구도 잔뜩 사가며 집을 꾸몄고, 내 사업을 꾸려 나가고 있다. 영국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로 한 대신 한국에 남기를 선택한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아등바등 공부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기어코 갔고, 인문학과에서 나름 대학 공부도 열심히 했고, 성적도 좋았고, 마음을 다하지 않은 일이 없고, 최선을 다해 살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어느 곳에서도 누구에게도 쓰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모멸감에 심히 괴로운 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기술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더랬다. 콘텐츠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다시 3D 디자인을 배웠고, 프로그래밍을 계속했다. 그리고 팀을 꾸려 작품을 준비했는데 그때 했던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꽤 괜찮은 상금도 받게 되었다. 그 공모전 덕분에 콘텐츠 제작자로 정착하여 여차저차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뒤로도 한 3년은 나를 뭐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 많은 날이 이어졌지만... 무엇이든 3년은 고꾸라져야 하나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 정착을 선택한 건 현명했고, 정말 운이 좋았다. 내가 워킹 홀리데이를 신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코로나란 세상에 없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전 세계가 이렇게 바뀌었지 않나. 그때 영국에 갔다면 아마 외지에서 분투하는 시간만 애매하게 보내다가 초기 코로나 때 한국에 바로 돌아왔을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면 등골이 송연해진다.


정착을 선택한 나는 이제 매일같이 밥벌이를 하기 위해 사업 계획서를 쓰고, 남들처럼 주식을 하고 일희일비하며, 저 멀리 부동산 시장도 기웃거린다. 단출한 가방 하나면 내게 필요한 모든 짐이 내 등 뒤에 있었던 때와는 달리, 이제 내 앞에는 32인치 거대한 모니터와, 16인치 와콤 태블릿과, 16인치 맥북과, 15인치 윈도우 노트북과, 문서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무수한 서류뭉치들과, 디지털 작업 파일들과, 마그네슘과 아연과 오메가 3과 같은 영양제와, 피지오겔 페이스 크림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지만, 삶 자체는 순례자일 때처럼 단순하게 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짐을 싸더라도, 짐을 풀더라도 결국 삶을 굴러가게 하는 일엔 바퀴의 축 같은 게 필요한 법이니까.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걷는다.’에서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일한다.’로 문자 두 개가 바뀌었을 뿐이다. 여행을 좋아하긴 하지만, 늘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것만이 좋은 여행인 건 아니니까. 나는 지금 내 집에서 ‘나’라는 낯선 사람의 새로운 취향을 발견해가고, 연애라는 가깝고도 먼 타인의 우주를 잠시 섞어보기도 했다가, 다시 또 내 안의 지구를 탐험하며 살고 있다.


나는 이 집에 내 여행의 짐을 잠시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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