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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istle Jan 21. 2018

'나마스떼'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하루

푼힐 트래킹 둘째날


넷째날의 여정

10월 6일 아침 트래킹 둘째날
선: 울레리 - Hungry Eye Lodge - 고래파니





울레리의 숙소에서 아침을 맞았다. 전날밤 저녁 식사 덕분에 지상의 일들이 생각나서일까, 꿈에서도 회사 사람들이 나왔다. 지각한 내가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망설이는 꿈. 하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본 창문 밖의 풍경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꿈이 더 현실같았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니!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한 뒤 아침을 먹으러 롯지의 야외 식당을 찾았다. 따뜻한 밀크 커피와 언제나 달걀 두개가 들어간 프라이, 강낭콩이 들어간 소스와 난을 닮은 네팔의 전통 빵. 오늘의 일정을 위해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그리고 롯지 너머로 보이는 이웃집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어젯밤의 습기와는 달리 따뜻한 아침 햇살에 빨래를 말리는 아낙들의 모습. 롯지 밑으로 지나가는 당나귀들도 정신없이 그렸다. 한껏 여유를 부리다 슬슬 두번째 일정을 시작하였다. 1리터의 물을 사고 숙소비를 지불하고 트래킹을 시작했다.







뭔가 신기했다. 산에서 자고 산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생활이라니. 당나귀 똥을 피해다니며 스틱을 짚고 걸어갔다. 잘 먹고 잘 자고 당나귀들처럼(!) 잘 싸는 게 정말 소중함을 깨닫는 하루하루다. 모든 일들을 내 몸에 집중하고 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몸이 무거워 지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걷게 되었다. 생각이 많이 든다는 것은 걷고 있는 길이 어렵지 않다는 증거였다.










날은 더웠다. 반팔의 티셔츠를 입고 땀을 흥건히 흘리며 아침의 산을 올랐다. 어제 트래킹을 늦게 시작하느라 보지 못했던 수많은 트래커들을 길목에서 만났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마스떼' 라고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묻고 힘을 나눴다. 남에게 인사하는 것이 서툰 사람들도 있었고, 해사하게 웃으며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과 서로 인사하는 세상에 살고 싶었던 나에겐 정말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인사 하나만으로 이렇게 힘이 날 수 있다니.





올라가다가 들른 파란 건물의 롯지 마을에서 빨간 사과와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어제 오후 탄산 음료에 속이 놀랐던 지라, 더이상 탄산 음료에 손을 대지 못했다. 네팔의 햇살과 바람을 맞고 자랐음 직한 사과는 작지만 속이 꽉 차 있었다.






산은 따뜻했다. 어머니의 품 속으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햇살은 눈부시고 그 아래로 가득 우거진 수풀 속에서 우리는 아침의 산행을 하고 있었다. 중간 중간 나오는 계곡물 소리에 안도하고, 더울 때쯤 부는 시원한 바람에 감사했다. 수령이 많은 나무들을 볼 때면 할머니를 만나는 것처럼 마음이 푸근하고 따뜻해졌다.









생각보다 올라가야 할 길들이 많았고 아침식사로 먹은 모든 것들이 속에서 다 바닥날 즈음, Hungry Eye 롯지가 나왔다. 모든 배고픈 이들을 위한 롯지라니! 롯지의 등장에 행복해 보이는 이들이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롯지 앞에 있는 식탁에 앉아 신라면과 달밧, 밀크티를 주문했다. 주방장 아저씨가 신라면에 네팔의 야채와 토마토를 듬뿍 넣어 조리를 해 주셨다. 정말 환상적인 맛...!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을 와서 신라면을 먹나 실감이 났다. 인드라 아저씨가 버팔로 고기를 먹어 보겠냐며 내어 주시기도 했다. 주방장 아저씨와 친해서인지 이런저런 음식도 얻어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버팔로 고기는 약간 질기면서도 카레 가루가 들어가 느끼한 맛이 덜했다. 순록 고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배고픈 눈빛의 트래커를 위한 식당




식사를 마치고 스케치북에 산길을 걸으며 느낀 생각들을 그대로 옮겨 그렸다. 이렇게 그리면 머릿속에 담고 있었던 생각들이 다 적히니까 다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저씨는 아기처럼 몸을 웅크린 내 알몸 그림이 재밌다며 연신 웃으셨다. 그리고 아저씨의 휴대폰 속에 담긴 추억의 사진들을 구경했다. 발리볼을 함께 하고 있는 아저씨네 부부, 잘생긴 두 아들들, 함께 했던 트래커들과 방문했던 진귀한 장소들. 이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더 친해진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다시 힘을 내어 산행을 시작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이었지만 둘째날은 왠지 힘이 많이 들지 않았다. 신기했던 점은 힘들지만 계속 웃음이 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실실 웃으며 지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이 산에 있는 것이 감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사하는 순간이 행복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오르막길을 오르니, 더 힘이 들지 않는 것도 재미있었다.






먼저 올라가 쉬고 계시던 인드라 아저씨



시원한 계곡물이 콸콸콸




그렇게 걷고 걸어서 고래파니 마을에 도착했다. 더 많이 걸을 수 있는데 오늘 산행은 짧은 편이었다. 문 앞에서 봄이와 즐겁게 사진을 찍고 롯지에 짐을 풀었다. 아래,위,옆 방 소리가 전부 들리는, 이층에 위치한 작은 방이었다. 난로가 있는 롯지 식당에서 산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 트래커들이 신기한 지 내 그림을 보고 감탄해 주어 기분이 좋았다. 동네 마실을 갈 겸 롯지 밖으로 나오자 트래킹을 온 한국인 중년 부부를 만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그리고 오늘 밤이 추울 수도 있어서 털모자를 사고, 따뜻한 시나몬 롤을 먹으며 가게 구경을 했다. 돈이 많다고 느꼈던 우리 둘은 흥정 없이 팔찌 여섯 개를 신나게 사 버리기도 했다. 



고래파니에 도착했다!




해맑은 미소의 아주머니 아저씨




예뻐서 별 생각 없이 산 팔찌들 (생각보다 큰 돈이었다..)





해가 지고 저녁을 주문했던 6시에 돌아와 롯지의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렸다. 책을 볼까 하며 가져왔는데, 읽다가 머리가 아팠다. 하루종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걷다가 활자를 읽으니 몸이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두통이 조금씩 찾아왔다. 여행을 준비할 때 읽은 책에서 ‘산행 후 지나친 두뇌 회전은 두통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농담인줄 알고 웃고 넘어갔는데. 정말 머리가 어지러워서 책을 덮고야 말았다. 



롯지의 식당에서 보이던 설산 풍경




그 사이 음식이 나왔다. 그릴드 치킨을 시켰던것 같은데, 치킨을 담은 그릴에서 엄청난 불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우리 음식이 제일 처음 나와서, 롯지 식당에 앉아있던 모든 여행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너 시킨거 이거 뭐야?’ 사람들이 연신 물어보았다. 하지만 화려했던 첫 모습만큼 맛이 있진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음식이 더 맛있었던 것 같다. 먹다보니 시킨 것들이 너무 많아서, 인드라 아저씨와 함께 나누어 먹었다. 매일 달밧만 드시다가 오랜만에 다른 메뉴를 먹는 것이 즐거웠는지 아저씨는 정말 맛있게 드셨다. 에베레스트 맥주를 조금 마시다가 머리가 더 아파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고래파니의 밤은 추웠다. 반팔을 입고 올라온 오늘 오후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패딩을 입고 있어야 하는 온도였다. 일층에 있는 샤워실에서 덜덜 떨면서 몸을 씻었다. 입에서는 입김이 나오는데, 물은 온도조절이 안되서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온갖 신기한 자세를 취하면서 샤워를 했다. 머리를 감으면 고산병에 걸릴 수 있다는 조언을 따라 그날 하루만 드라이 샴푸로 해결했다. 사람들은 몸을 녹이기 위해 롯지 식당에 있는 드럼통 난로 주위에 옹기종기 모였다. 노르웨이에서 왔다는 작은 얼굴의 금발 언니들 두명과 산행을 처음 하는 네팔 젊은 청년들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금발 아가씨들은 우리 옆방에 짐을 풀었고,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여정을 거치고 있다 했다. 샤워를 했는데 긴 머리가 잘 마르지 않는지 머리를 거꾸로 젖힌 채 불을 쬐고 있었다. 네팔 젊은 청년들은 20살이 갓 된 사람과 그의 형제들(친형제인지는 모르겠다)이 함께 왔다. 20살 남짓의 청년은 수줍은 얼굴로 우리에게 페이스북 주소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형제들은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비틀즈, 제임스 므라즈, 그리고 수많은 노래들 (하도 시간이 지나서 이제 기억이 안난다니 슬프다) 그리고 네팔 노래들도. 신기하게도 따뜻한 선율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몸이 뜨끈해진다. 책 때문에 찾아온 두통을 삭히기 위해 인드라 아저씨의 조언에 따라 뜨거운 생강차에 소금을 뿌려 마셨다. 노란 조명의 롯지에서 난로와 음악, 생강차 덕분에 몸이 한결 좋아졌다. 이런 기분을 놓치기 싫어서 봄이와 함께 방에서 스케치북을 들고 나와 그림을 그렸다. 시리아에서 왔다는 한 청년이 덜덜 떨면서 그림을 칭찬해 주었다. 그는 두꺼운 옷을 많이 챙겨오지 못했는지 검은 자켓에 잭다니엘 병을 가슴팍에 끼고 있었다. 봄이는 롯지를 나와 별을 보러 잠시 다녀왔다.














인드라 아저씨는 부엌에 들어가 롯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내일 오전 다섯시에 푼힐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자고 약속했다. 몇시에 잤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는데, 방에서 봄이가 가져온 아이팟으로 잔잔한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방 역시 추워서, 다음날 아침에 입고 갈 옷을 다 껴입고 털모자까지 쓴 채 잠을 청했다.




방음이 하나도 안되고 추운 방. 그래도 아주 푹 잘잤다. 창가의 털모자 두개는 그날의 신상.



봄이가 찍은 별이 빛나는 밤




잘 일어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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