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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팍틸 박경화 Dec 04. 2017

[2화] 면접의 굴레

침묵으로 일관한 세상에 대한 외침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인가..

더군다나 선생님 말씀으로는 대기업에서 100% 출자한 계열사라 작지만 알찬 회사라고 했다.

알찬 회사.. 이 얼마나 안심과 편안함을 주는 말인가.

낼 수 있다고 서둘러 전화를 끊고는 동네 문구점에 들러 새 이력서 양식을 사 정성껏 써 내려갔다.


‘화목한 가정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저는

엄격하신 아버지와 따뜻하신 어머니 사이에서……’

문득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딱히 쓸 말도 없는 성장과정이었다. 아니 쓸 엄두가 나질 않는 성장과정이다.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글씨체로 한 글자 한 글자 채워나갔다. 자칫 잘못 적기라도 하면 다시 처음부터 써야 했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가까스로 완성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고 집을 나서려니 이미 마감시간 6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급하게 출발하긴 했지만, 도저히 시간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버스정류장 근처 공중전화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저 오늘 거기 이력서 내려고 가고 있는데요. 제가 늦게 전달받아 서둘렀는데도 시간이 안될 거 같은데요.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횡설수설하는 내 목소리 안에 꼭 내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전해진 것일까?


괜찮으니 천천히 오라는 인자한 중년의 남자 목소리를 듣자 놀랍게도 마음이 진 되었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여기는 또 어디란 말인가. 난생처음 보는 높게 솟은 빌딩 숲 사이로 정신없이 오가는 많은 사람들. TV 드라마에서나 보던 직장인 모습 그대로였다. 이 골몰이 그 골목 같고, 다시 또 그 골목인 거 같은데 다른 골목이고.. 끝없는 미로 속 미지의 섬처럼 느껴진 여의도 어딘가로 물어물어 간신히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뛰어들어가다시피 사무실에 들어서니, 헐레벌떡 들어오는 나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이런.. 사무실 안이 그리 조용할 줄이야.

하긴 그동안 면접 봤던 곳들은 하나같이 회사다운 회사가 없었으니…

늦을까 봐 뛴 탓일까.. 회사 분위기에 놀란 탓일까.. 아니면 빌딩 안 따뜻한 히터 바람 때문이었을까..

땀은 비 오듯이 하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한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왜 이렇게 땀을 흘려요?”

연신 땀을 닦으며 이력서를 들고 있는 나에게 휴지를 건네주었다.

땀을 닦으며 “늦을까 봐 뛰어오다 보니….”

화장도 할 줄 몰라 대충 찍어 바르고 왔는데 그나마도 다 지워졌겠다 혼자 생각하고 있는 사이..

젊어 보이는 또 다른 남자가 다가오더니 내 이력서를 대충 훑어보고는  

“접수되었습니다. 면접 보게 되면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나오려는데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수군수군 대는 모습이 좀 이상했다.

‘내 얼굴에 휴지라도 묻었나.’

뭐 어쨌든 난 이력서를 접수했으니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사실 못 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접수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 사이도 전화를 걸고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몇 군데 보러 다녔다. 면접 날짜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 기다리는 삐삐나 집전화는 끝끝내 울리지 않았다.


이상했다. 분명히 그 나이 좀 있어 보이는 분이 날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는데…

용기 내어 그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의 젊은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저.. 전화를 주신다고 했는데 전화가 오지 않아서, 궁금해서 전화드렸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네, 전 이수경이라고 합니다.”

“잠시만요..”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놀라울 것도 없었다.

“이수경 씨는 합격자 명단에 없으시네요. 죄송합니다.”


참 인생이 반전이 없다. 늘 예상대로 흘러갔다.

아버지의 부도도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놀라울 게 없었다. 아니 성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대가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세상은 나의 물음에 늘 침묵했다. 누구에게는 기회가 여러 번 주어지기도 한다는데, 기회도 나에겐 사치였다. 아쉬운 마음을 달랠 새도 없이 또다시 전화하고 이력서를 들고 다니며 다른 날들이 같은 날처럼 무한 반복되었다.


한 달 즈음 지났을까?

집에 들어서는데 '삐비비비비빅, 삐비비비비빅…' 갑자기 삐삐가 울려댔다.

삐삐가 도대체 며칠 만에 울리는 것인지.


대학을 포기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 싫어 새 번호로 바꿨더니 울릴 일이 없었다.

고장 난 건 아닌지 혼자 테스트까지 해보았으니.. 삐삐도 참 심심한 주인 만났다 싶다.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왠지 번호가 낯익었다.

조심스레 전화기에 번호를 눌렀다.


"네.. 번호 남기셨길래 전화드렸는데요."

“안녕하세요. 이수경 씨. 여기 유중입니다. 일전에 저희 회사에 서류 접수하셨었죠?”

얼떨떨해 대답도 제대로 못하는 사이

“내일 면접 보러 오실 수 있으신가요? 장소는 그때 오셨던 곳으로 오시면 되고 시간은….”

갑자기 이게 웬일인가.

그 회사는 아예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한 달이나 지난 지금 면접을 보러 오라니…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갑자기 쿵쾅쿵쾅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다음날 면접용 옷을 깨끗하게 갖춰 입고 난생처음으로 미용실에서 드라이도 했다.

무슨 드라이를 7000원씩이나 받는지…

어쨌든 옷을 갖춰 입고, 미용실에서 드라이까지 받으니 신데렐라라도 된 기분이었다.

오늘은 땀 흘리지 않게, 여유 있게 버스를 타고 여유 있게 걸어갔다.

일찍 출발한 덕분이다. 밖에서 서성이다 10분 전에 맞춰 사무실에 올라갔다.


안내받은 회의실로 들어서니 예전에 미소로 맞이해 주셨던 남자분이 앉아 계셨다.

그분은 영업팀 팀장님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높은 직급에 놀라는 사이 한마디 하신다.

“면접을 볼 때는 '그랬어요~ 이랬어요~' 하지 말고 '그랬습니다. 알겠습니다.' 하고 다를 붙여요.”

이 분께 면접 보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빙그레 웃으며

“오늘 사장님 면접 보는 거예요.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고 그냥 편안하게 하면 됩니다.”

사장님 면접이라니…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윽고 면접은 시작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면접을 마치고 난 면접장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질문에 무슨 대답을 했는지 머리하얘져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다리는 후들후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운이 쏙 빠진 채로 멍하니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웬일로 동생이 마 나와 있었다.

“언니 회사에서 전화 왔어. 합격했다고 내일부터 출근하래.. 언니 이제 돈 버는 거야?”


세상이 나에게 준 첫번째 대답이었다.


<3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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