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내 지적 수준의 한계 때문에 줄리언 반스를 처음 접한 것은 영화를 통해서였다. 아무 생각 없이 씨네큐브에서 고른 영화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였는데, 다크 아카데미아적 미장센과 샬롯 램플링의 냉소적인 연기를 빼고는 그다지 마음에 드는 영화는 아니었다. 등장인물들의 동기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기를 찾아보면서 소설 원작의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 원작이 더 낫다는 평과 줄리언 반스의 글을 극찬하는 것을 보고 그의 다른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고른 것이 "연애의 기억"이었다. 첫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책을 던져버리고 말았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마찬가지로 어린 청년이 친구 엄마와 놀아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더 넘겼을 때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에 대한 궁금함이 식으면서, 이 작가는 젊었을 때 MILF 판타지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는 생각으로 책을 팔아치웠다. 아메리칸 파이는 차라리 능청스럽기라도 하지, '친구 엄마랑 잔'이야기를 청승맞게 풀어낸 소설은 건들기도 싫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만 고생하는 게 아니라 머리도 고생한다. 줄리언 반스를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하고 몇 년 후, 같은 회사의 동료가 줄리언 반스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워낙 양질의 책을 많이 읽는 동료였기 때문에 줄리언 반스에게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줄리언 반스를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당시 새로 발간된 줄리언 반스의 또 다른 책은 왠지 재미있어 보였던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책은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책의 세일즈 포인트는 사뮈엘 포치라는 난봉꾼 산부인과 의사가 의외로 벨 에포크 시기의 문화계 저명인사들과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무려 줄리언 반스가 썼다는 점이었다. 표지에는 존 싱어 사전트가 끝내주게 그려준 사뮈엘 포치의 강렬한 초상화가 인쇄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책을 구입한 사람들의 절반은 줄리언 반스보다는 그 초상화 때문에 책을 샀을 것이다. 초상화에서 사뮈엘 포치는 새빨간 로브를 입고 있는데, 사뮈엘 포치라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외면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존 싱어 사전트가 그린 사뮈엘 포치의 초상과 찰스3세의 첫 공식 초상화. 강렬한 빨강을 썼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책 소개만 보면,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의사인 사뮈엘 포치의 다면적인 매력과 벨 에포크 시기의 그의 삶에 대해서 파헤치는 내용처럼 보인다. 그 시기의 의사로서의 면모, 그의 여성편력을 부각하면서 당시 셀렙들을 예술가 사이의 의사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는 내용을 기대했던 나의 수준이 너무 얄팍했었던 것 같다. 줄리언 반스는 자료가 부족했을 법한 포치의 삶에만 할애하는 대신, 그 시기에 파리와 런던에서 댄디즘의 핵심 멤버였던 게이 한량들의 삶에 주목한다. 그들의 성정체성과 별개로 그들이 독자입장에서는 그다지 흥미롭지않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책을 매우 지루하게 만들었다. 마치 현대 서울의 예술가나 미술 애호가들의 성정체성이나, 패션스타일, 그들의 애인이 누구였는지와 같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지엽적인 내용을 옆테이블에서 떠드는 것을 홍대 카페 어딘가에 앉아서 지루하게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의 줄리언 반스에 대한 두 번째 시도도 실패했던 것이다. 다만, 책표지의 기깔나는 초상화의 작가가 존 싱어 사전트였다는 것과 그가 마담 X라는 도발적인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 마담 X의 뒷 이야기는 유일하게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어찌 됐든 사전트의 그림과 모델은 매력적이니까.
지금 테이트 브리튼에서는 '존 싱어 사전트와 패션'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열고 있다. 줄리언 반스에는 고개를 흔들게 되었지만, 왠지 사전트에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미술관을 찾았다. 어처구니없게도 테이트 모던과 브리튼이 다른 미술관인지도 모르고 테이트 모던을 먼저 찾았다가 테이트 브리튼으로 가기 위해 팔자에도 없던 유람선까지 타게 되었다. '마담 X'를 포함하여, 사뮈엘 포치의 초상화인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Elsie Palmer'의 초상까지, 어딘가에서 봤을 법한 사전트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사전트 본인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그의 고객들도 대부분 부유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도 도금시대의 돈 냄새를 풍긴다. 영화 '순수의 시대'에 나올 법한 서구 상류층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보면서, 극동에서 온 외노자의 배우자가 20파운드 정도 내고 그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데서 세상이 참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
부와 자신감의 냄새가 풍기는 사전트의 고객들
런던의 한 지인은 런던의 수많은 미술관 중에 테이트 브리튼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내셔널 갤러리나 다른 박물관들과 다르게 도떼기시장 같지 않고 정말 미술관답게 고요해서이다. 나는 테이트 브리튼에 처음 방문하고서는 다른 영국의 미술관보다 테이트 브리튼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 '영국의 것'이 주로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남의 것을 악착같이 긁어모았다면, 테이트 브리튼은 영국 미술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명세는 떨어지지만, 영국 미술 나름의 훌륭함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의 한 구석에서 영국의 국조인 꼬까울새를 발견하면,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영국 극작가의 작품을 그릴 때, 지극히 영국적인 요소들을 넣었어도 훌륭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가 전반적으로 영국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그림에는 미소 짓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필리아와 우측상단의 꼬까울새를 확대한 모습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는 이번 줄리언 반스는 끝까지 꼭 읽고 말겠다는 각오로 꾸역꾸역 읽어냈고, 다 읽자마자 팔아먹었다. 정말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다. 책을 알라딘에 팔아먹고 나서 예전에 줄리언 반스를 읽고 있었던 그 동료에게 물었다. "저번에 줄리언 반스 읽고 있었잖아, 어떤 부분이 좋았어?" "안 좋았어." 동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워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비록 줄리언 반스의 찍먹에 실패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보면 죄다 호평 투성이다. 도대체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기 위해서는 그의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