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로부터 생각한 책의 미래
"현재의 출판 시장은 노래방과 같다. 노래하는 사람만 가득하고 듣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출판의 미래>를 쓴 저자이자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장은수씨가 얼마 전 서울신문에 기고한 글에 일본의 출판평론가 사노 신이치의 말이 위와 같이 언급되어 있다. 책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매년 출판사는 늘어나고, 책 발행부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 노래방이 어딘가. 아직 10월인데 11월 신곡이 빼곡하게 들어 찬 곳이 아닌가. 정작 노래방 애창곡이니 뭐니 하며 즐겨 부르는 곡은 한정적이고 레퍼토리는 뻔한데도 신곡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것처럼, 책도 매년 발행되는 신규종수가 증가해, 이미 8만부를 넘어섰다고 한다.
책이 그렇게 끊임없이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판사로 먹고 살려면 매우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신간을 내야한다. 출판계 내부 사정이야 어찌됐든, 하루에도 수백만개씩 쏟아지는 유튜브 콘텐츠, 이곳 브런치처럼 소셜미디어를 통해 발행되는 글들, 골프, 낚시, 캠핑, 여행, 각종 공연에 페스티벌까지. 할 것도 볼 것도 많은 시대에 따분하게 책이 왠 말인가. 책,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세상은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함에 따라 발전을 거듭해왔고, 낡은 기기는 자연스럽게 쇠퇴하거나 혁신을 더해 재탄생되었다. 인류의 에너지가 나무로부터 화석연료, 전기, 핵, 청정 에너지로 변해왔고 그에 따라 에너지를 이용하는 기기도 변해온것처럼.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은 오래 두고 사용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것은 사라지지 않고 그 모양을, 형태를, 그릇을 바꿀 뿐이다. 증기기관차가 더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 사라졌다고 해서 기차라는 수단 자체가 없어진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책은? 책도 다만 그 모양과 형태를 바꿔갈 뿐이지 어쩌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책의역습>을 쓴 우치누마 신타로는 이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출판업계의 미래는 확실히 말해서 어둡지만, 살아남는 방법은 많이 있으며 책의 미래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밝고 가능성의 바다가 넓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서문)
책의 미래와 가능성에서 꼭 생각해야 할 점의 하나로써, 대전제가 되는 것은 '책의정의를 확장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언어대로, '파일만 바뀐 것'이며, 그림이나 영상이나 목소리도 모두 책이 될 수 있다고 봐야한다. 책이 필요한 이유는 그 속의 이야기, 기록, 지혜, 가르침이 때문이지 책이라는 물성을 가진 그릇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릇이 더 필요해보이지만......)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콘텐츠도 책이라고, 책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책이 다른 미디어와 구별되는 특징 때문에, 책은 책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예를들면 이런 것들이다.
첫째, 주도권이 온전히 독자에게 있다. 곧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미디어라는 말인데, 책은 독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부분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 TV나 라디오처럼 특정한 시간대를 기다려야하거나 분량의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책 한 권만 들고 다닐 각오가 되어 있다면, 시간과 장소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둘째, 책 이외의 불필요한 요소로부터 자유롭다. 즉, 광고로부터 자유롭다. 유튜브의 경우 유튜브 레드 서비스가 아니라면 광고를 봐야하고, 네이버나 카카오, 아프리카 TV와 같은 인터넷 TV도 원하는 컨텐츠를 보기 위해 불필요한 광고를 시청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셋째, 분량과 소비에 제한이 없다. 한 편의 글을 창작자는 호흡을 달리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독자도 원하는만큼 소비할 수 있다. 체력이 받쳐준다면 삼국지니 토지니 하는 장편도 며칠내 끝낼 수 있다는 말이다. 책 줄 꽤나 읽었다는 형제자매분들이 어릴적 세계문학에 빠져 며칠 밤을 꼴딱 세웠다는 그 구라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서 넷플릭스는 책에 가깝다.
전세계적으로 4G니 5G니 하며 LTE급 데이터를 무한대로 쓰는 유일한 국가에 살며 주기적으로 통신사의 노예를 자처하고 최신 휴대폰으로 바꾸는 우리에게 모바일만 주어진다면 시공의 제약이 있는 콘텐츠란 존재하지 않는다. 온전히 주도권을 갖고 선택하며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다. 피씨,태블릿,모바일까지 개인의 접속 환경에 따라 언제든지 이어보기가 가능하다. 마치 책에 책갈피를 끼워놓고 이어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게다가 넷플릭스는 광고를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어디서 무엇으로 접속하든 불필요한 콘텐츠에 노출되지 않는다. 책이다.
넷플릭스에서 오리지널 콘텐츠 다음으로 인기가 있는 카테고리는 의외로 다큐멘터리라고 한다. 다큐멘터리는 태생적으로 비용이 많이드는데 비해 인기가 없어 항상 창사특집이니 하는 거창하고 거시기한 명분없이 만들지 않는다. 시간대 역시 제약이 많아 프라임 타임에 다큐를 본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몇 부작이니 하며 콘텐츠 분량의 제한이 생기기 마련이라, 긴호흡을 갖고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고, 지금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나 노력, 운동이 무엇인지 혹은 우리가 생각해볼만 한 것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밝혀내야 할 다큐멘터리가 앞 뒤 다 짜르고 기승전결 없이 문제의식만 던지니 재미가 없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이를 극복해낸다. 시즌제로 긴호흡을 갖고 제작될 수 있으니 다큐가 재미있어지고, 전세계의 다양한 문제의식과 기호를 가진 독자들이 이를 지지해준다. 책이다.
넷플릭스의 CEO 리드 헤이스팅스는 매거진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넷플릭스는 TV를 전통매체인 책이나 매거진과 같이 사용자에게 통제권을 넘겨주었다. 더이상 티비를 보며 광고를 볼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사실 넷플릭스는 미국을 비롯해 다국적 기업에 서비스하고, 영상 콘텐츠를 다루기 때문에 인터넷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자연스럽게 최적의 서비스 환경을 모바일보다는 TV로 보았을 것이고, 넷플릭스가 대체하게 될 산업을 티비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모바일 한 대만 있다면 데이터를 마음껏 쓰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기 때문에 TV보다는 책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더이상 책을 용기에 담긴 텍스트 덩어리로 보는 시각은 피해야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른 미디어와 결합하고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영상이든 소리든 그림이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간에 창작자가 이것은 책이다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면, 혹은 독자가 이것은 일종의 책이다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책이 될 수 있다고 봐야한다. 출판사가 저자와 협의하에 하나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풀려고 시도해본다면, 그리고 그것을 소셜미디어에 챕터별로 나눠서 업로드해 보려고 한다면 그 또한 책일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이 한 편의 시집을 내고 가수가 그에 곡을 부치면 그것은 시집인가 노래인가. 3부작 시리즈의 스릴러물을 1부는 웹툰으로 2부는 소설로 3부는 영화로 만든다면 그것은 책일까 만화일까 영화일까.
여러 상상을 해본다.
여러분도 저처럼 책을 좋아한다면, 아래 책에 추천 드립니다.
<책의 역습> 우치누마 신타로 지음, 문희언 옮김, 하루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동네서점> 다구치 미키토 지음, 홍성민 옮김, 펄북스
<앞으로의 책방> 기타다 히로미쓰 지음, 문희언 옮김, 여름의숲
<서점을 둘러싼 희망> 문희언 지음, 여름의숲
<책따위안읽어도좋지만> 하바 요시타카 지음, 홍성민 옮김, 더난출판
<출판의미래> 장은수 지음, 오르트
기사 출처
장은수, [문화마당] 무엇이 출판을 죽이는가/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01103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