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좋은 훈련이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아 탈이다.
천성이기도 하고 '마케터'로 밥벌이를 '잘'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관심있는 일 자체도, 배우고 싶은 것도, 또 잘하고 싶은 일도 남들에 비해 꽤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흉내내는 재주가 많아 주변에서 '팔방미인'이란 얘기도 듣고 이 얘기 저 얘기 여러 화제에도 제법 잘 낄 수 있지만, 실상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는 얄팍한 놈이다. 노포에서 고집스레 지켜온 방식과 정성스런 재료로 오래 끓여 우려낸 육수 맛이 아니라 적당히 MSG로 맛을 낸 5천원짜리 구내식당 무우국 같다고 할까.
원래 마케팅이란게 누굴 속이는 일이라 했다. 고객에게 제품이나 서비스가 제안하는 가치보다 더 크고 값지게 느끼도록 만들어 파는 일이 그 본질이다. 적어도 남을 속이지는 않더라도, 있어보이게 써내고(write), 그리고(design), 만드는(perform) 일인 셈이다. 따라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엿보고, 먹어보고 경험해보는 일이 마케터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경험해봐야 알고, 알아야 가치있는 제안이 나온다. 내 경우엔 주로 여행과 책에서 영감을 받는 편이다.
요리도 그렇게 시작됐다. Food tech 서비스부터 현재 준비중인 출판 프로젝트까지, 어쩌다 보니 밥벌이가 '먹고 사는' 문제를 다루게 되자 자연스레 'Food'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략 2014년부터니 한 3~4년 정도 흉내를 냈는데, 요리를 하면서 내가 느껴온 다섯 가지를 적어본다. 난 전문 요리사가 아니다. 철저히 주관적인 생각과 경험에 비롯한 의견임을 밝힌다.
1. 멀티태스킹 능력을 기르는 최고의 훈련
요리는 멀티태스킹이 기본이다. 특히 집에서 혼자 있는 재료를 활용해 만드는 음식은 '후다닥 짧은 시간'에 만들어 내는 것이 필수라 물을 끓이면서 재료를 다듬어야 하고 동시에 볶고 설겆이하고 플레이팅까지 해내야 한다. 요리를 다 마쳤을 때 설겆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야 하는 것이 기본! 요리야말로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고 관찰하고 머리를 써야하는 작업이다. 요리만큼 좋은 멀티태스킹 훈련은 없는 것 같다. 사정이 그러하니 많은 요리사가 팔꿈치나 손목에 이상이 온다. 얼마나 쉴새없이 썼겠는가.
2. 창의적인 기획에서부터 정확한 계량과 계측, 순서에 맞춰 시간을 지켜내는 실행
요리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생각없이 요리를 시작할 수 없다. 요리의 시작은 재료 준비부터다. 당연히 무엇을 만들지 '기획'이 서있지 않다면 어떤 재료를 사야할 지, 어떤 재료를 쓸 지 알수가 없다. 머리속에 '아 오늘은 무얼 먹어야겠다'가 서있어야 하거나 최소한 냉장고 안을 뒤졌을 때 '이 정도는 만들어 먹을 수 있겠다'가 떠올라야 한다. 이런 기획이 선 다음은 순서다. 어떤 것을 가장 먼저해야 할지, 어떤 일이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판단하고 시작해야 한다. 볶음 요리를 할 때는 어떤가. 어떤 재료부터 볶아야 하는지 다 순서가 있다. 물이 베어나오는 재료도 있고, 금방 쪼그라들거나 타버리는 열에 취약한 재료도 있다. 계량과 계측은 어떤가. 소위 손 맛이라고 하는 이것은 모두 계량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알맞은 간을 찾아내는 손 맛. 우리 어머니들이 많은 시간 식구들을 먹이느라 습득한 초자연적인 힘. 모두 계량이다. 알맞은 양을 사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칠맛을 좌우하는 것도 시원하게 매운 맛을 만들어 내는 일도 단짠단짠의 매력을 발산하는 일도 모두 간이고, 간은 계량에서부터다. 플레이팅은 어떤가. 디자인의 영역과도 같은 이 플레이팅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맛보다 멋, 이미지가 현실을 지배하는 시대에 플레이팅은 SNS를 위해 굉장히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나는 아무리 해도 플레이팅이 잘 안되어 포기해버린 케이스이지만, 플레이팅 역시 마케터가 디자인을 고민하는 바와 매우 닮아 있다. 요리는 마케터가 반드시 취미로 해야 할 일이다.
3. 아내와의 대화
우리 부부는 맞벌이다. 주말이 되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생기고, 그마저도 아이들이 노는 사이에 틈틈히 하거나 모두 잠에 빠진 후 시작된다. 그렇게 짧고 굵게 못다 한 이야기를 따라잡는 시간을 풍성하게 만드는 건 다름아닌 맛있는 안주와 술. 내 요리의 대부분이 식사보다 안주에 가깝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연애만 15년에 결혼 생활 10년이라 상대방이 무얼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어떤 타입의 인간인지, 무엇에 취약한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그건 그동안 누구보다 많이 얘기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 부부으 화두는 말(wording). 사이 좋은 부부는 서로에게 말을 예쁘게 쓴다고 한다. 대화를 갖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 것, 무엇보다 그로인해 쉼을 얻는게 매우 중요하다. 재미있는 강연 클립을 첨부한다. 김창옥 교수의 강연이다. https://www.facebook.com/515226888629608/posts/1459175844234703/
4. 치매 예방
앞에서 말한 멀티태스킹과 같은 맥락이기도 한데, 요리는 치매예방에 무척 도움이 된다고 한다. 쉴새 없이 머리를 쓰고 손을 놀리고 창의적인 발상을 하니 그런 것 같다. 나는 어머니쪽이 이 몹쓸 질병에 취약한 역사를 보였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관리하고 싶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어떤 이유든 취미 생활 하나씩은 필요하다.
5. 됐고, 술이나 먹자
사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술이 고플 때 맛있는 요리가 필요하다. 어쨌든 먹고 사는 일 아닌가. 쓰다보니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게 오늘 저녁도 솜씨 한 번 발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