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영화 <사냥의 시간>
<사냥의 시간>은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다. 물가는 폭등하고, 돈의 가치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시대. 취업은커녕, 범죄가 들끓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4명의 청년이 주인공이다. 영화 속 청년들은 순수하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고 나쁜 짓을 하지만, 악으로 설정되지는 않는다. 그들을 도둑으로 만든 세상을 탓한다.
영화는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지만,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영화 <씬 시티>에서 보여주는 농익은 킬러들의 세계는 아니다. 이제 갓 세상에 나온,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청년들의 이야기다.
청년들은 한탕 크게 하고 지옥 같은 이 나라를 벗어나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 그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 한탕하고 도망가서 하는 일이 겨우 자전거 수리점이니, 말해 무엇하랴.
감독은 오늘날 헬조선이라고 불리는 현대의 우리 사회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더럽고, 야비하고, 치열한 경쟁 속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 늑대와 살쾡이와 하이에나들이 들끓는 곳.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설 수 없는 죽음의 세상. 영화는 그런 세상 속에서 청년들의 선택에, 아니 반응에 포커스를 맞춘다.
"너희들이 지금 뭔 짓 하는지 알고 하는 거냐?"
영화 속 청년들에게 하는 어느 어른의 대사이다. 그 충고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걱정? 연민? 사랑? 그저 어린놈의 새끼들이라는 깔봄만이 있을 뿐이다. 어른이 보기에 그들의 도둑질은 가소롭다.
'병신', '씨발놈아' 하는 저들끼리의 욕. 그 욕은 어설프게 느껴진다. 아무리 강해 보이려고 하지만 그들은 아직 어리다. 순수함은 쫓긴다. 이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영화 속에서는 한 명의 헌터가 청년들을 좇지만, 사실 그들을 쫓는 것은 세상이다.
<사냥의 시간>에서 사냥이 시작되는 시간은 언제일까? 청년들이 도둑질을 하고 헌터에게 쫓기기 시작하면서일까. 아니다. 사냥의 시간은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 가서 비로소 시작된다.
대한민국을 탈출한 청년은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을 쫓아냈던, 그 거대함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맞서기로 결심한다.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처럼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신기루를 좇다가, ‘여기가 아닌게벼’ 하는 깨달음을 얻고 비로소 자신이 살아가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 현실과 맞서 싸우려 한다.
영화는 지옥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청년들을 연민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세상이 청년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탓하지만 말고, 스스로 세상에 맞서 직접 사냥에 나서라고 권고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오늘날 실제 사회를 상징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러나 그 수법이 단순하고 조악하다. 영화의 이야기 구조 자체는 인물의 동기를 설명하지 못하고 짜임새는 허술하다. 우리의 관객들은 이미 수많은 영화와 책을 통해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자연스레 학습해 왔고, 또 익숙하기에 영화는 재미없게 느껴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상징으로 도배된 <사냥의 시간>에 대해 그저 비아냥거리고 싶지만은 않다. 개연성이 적은, 현실 같지 않은 현실 속에서, 순수한 아이들의 반응은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맥락을 생각하면 분명 '나쁜 영화'는 아니다. 감독은 그가 연출한 영화 <파수꾼>에서 이미 소년들의 심리를 깊이 있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 실험적인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지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사냥의 시간>은 어설픈 미장센 속에서 어울리지 않은 순수 청년들이 뛰노는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이질감이 우리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가 주는 경고와 메시지는 분명하다 못해 너무 단순하지만 영화를 본 이후의 잔상은 생각보다 길게 남는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이재훈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이미 어른의 분노와 목표를 갖게 된다. 도박장을 털던 풋내기는 자격증도 따고 토익도 공부하고, 소위 스펙을 쌓아 독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이 살던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런 그의 선택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다양한 각도로 상상하게 된다.